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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TC

기독교와 진화론, 전생, 사주

by Simon de Cyrene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이다. 개인적으로 그 표현을 좋아하진 않는다. 신앙이 부모의 태 안에 아기가 있을 때부터 생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교회에 다니시는 부모님의 자녀로 태어나서 교회 문화에 익숙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그 사람의 신앙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먼저, 오래 믿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신앙이 반드시 더 깊거나 좋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모태신앙이란 표현을 좋아하진 않는다. 어쨌든, 분명한 건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항상 교회 틀 안에 있었단 단 것이다.


나처럼 모태신앙으로 분류된 사람들 중 상당수는 두 가지 길을 가는 경우가 있다. 첫 번째는 교회를 떠나는 부류다. 어렸을 때부터 맹목적으로 믿을 것을 강요받고,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에 지치는데 내로남불을 시전 하는 교회 사람들을 보면서 성장한 사람들 중에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 교회를 물리적으로 떠나지 않더라도 형식적으로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들 중 굉장히 많다.


또 다른 부류는 맹목적으로 교회에 충성하는 사람들이다. 내게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목회를 하시는 분들이 하나님의 대리인도 아니고, 그들도 틀릴 때가 있기 때문에 목회자를 맹목적으로 따라서는 안된다. 그런데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들 신앙을 유지하는 이들 중 상당수는 특정 목회자나 교회에 충성을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게 '저는 교회에 충성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충성합니다'는 말은 불경스러운 말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나는 제삼의 길을 갔고, 여전히 가고 있다. 어렸을 때는 교회의 틀 안에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게 맞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학부시절 나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다양한 종교를 들여다봤다.


나의 이러한 성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해외에서 학교를 다닐 때 역사를 가르치셨던 선생님이었다. 개신교 신자로 알고 있었던 그 선생님이 어느 날 불경을 읽고 있는 걸 보고 왜 그런 책을 읽냐고 물어봤더니, 선생님께서 나를 옆에 앉혀 놓으시고 본인이 왜 불교를 종교가 아닌 철학으로 생각하는 지를 설명해 주시더라. 내가 너무 좋아했던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모든 게 혼란스러웠고, 그 영향은 내 안에 남아 나는 성인이 된 뒤에 여러 종교를 얇고 넓게 들여다보며 고민하고, 상상하면서 생각들을 정리했다.


그 결과 나는 '개신교' 신자로 남았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 신학서적들과 성경을 읽으면서 생각들을 정리했고, 이제 나는 매우 높은 확률로 개신교 신자로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개신교'라는 종교는 진리이자, 내 삶의 방향성이며 나침판일 뿐 아니라 '인생은 기쁨과 고통이 공존하며,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기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다'라고 이성적으로는 생각하는 내가 숨 쉬고 살게 만드는 몇 가지 이유 중 한 가지다. [그에 대한 거칠지만 솔직한 나의 생각들은 "어느 개신교 신자의 시선(클릭)"이란 시리즈에 담겨 있으니 이 글에서 그 내용은 생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의심하고 도전하는 편이다.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하지 말라는 것은 왜 그런지를 고민하고, 그와 관련된 내용을 시간이 될 때 찾아보는 편이다. 만약 개신교 교리가 진리라면, 그게 내 삶의 방향성이라면 그렇게 도전을 했을 때도 그에 대한 명확한 설명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를 위해서 간단하게 내가 생각하는 개신교 성경에 대해 설명하자면, 나는 개신교 성경은 인간과 신에 대한 사용설명서라고 생각한다. 그 안에는 예시와 비유, 사례들로 신과 인간은 어떤 존재이고, 그 안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다. 개신교에서의 성경은 정확히 거기에서 멈춘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같은 말은 성경에 없고, 사후세계에 대해서도 성경은 분명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성경과 개신교의 특징이 내가 개신교 신자로 남게 된 이유였다. 솔직히 말해보자. 사후세계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사후세계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거나 그들이 말하는 선지자들이 신이 보여준 것을 받아 적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디테일한 내용을 신이 왜 그 사람에게만 보여주는지는 설명되지 않고, 때로는 그 디테일이 너무 구체적이어서 사람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대부분의 종교는 그런 인위적인 요소들을 갖고 있다. 심지어 같은 기독교로 분류되는 천주교도 성자나 연옥과 같은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만든다. 사실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그런 도구들을 통해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게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의 전통을 따르는 교회들은 그런 장치들을 인위적으로 만들거나 믿지 않는다. 개신교의 성경과 교리는 들여다보고 공부하면 할수록 드라이하고, 현실에 충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원리들은 인류역사의 흐름에 반영이 되었고, 인간과 신에 대해 가장 정확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개신교 신자로 남았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진화론 논쟁만큼 쓸모없는 것도 없다. 성경은 애초에 과학책이 아니지 않나? 그리고 진화론과 창조론은 끝까지 가면 모두 결국은 믿음의 문제다.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시작부터 지금까지 입증된 게 아니고 '진화'란 이름으로 근거 없는 이론들도 굉장히 많이 제기되어 왔고, 여전히 그러하고 있다.


무작정 창조론을 믿는 것은 어떨까? 그것 또한 환경에 따라 생물 안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과학적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수용되기 힘든 주장이다. 창세기에 나와 있는 천지창조는, 신이 만물의 질서를 주관하고, 그 안에서 인간 안에 어떠한 본성과 모습이 어떻게 자리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목적으로 있는 것이지 과학적으로 입증을 하기 위한 내용이 아님을 개신교 신자들은 받아들여야 한다.


개인적으로 이 논쟁을 좋아하지 않는 건, 이 논쟁에 매몰되다 보면 성경에서 창조를 통해 인간에게 전하는 말과 우리 삶의 목적을 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신이 인간 안에 심어 놓은 선한 모습과 계획이 있고, 인간은 그 모습을 회복하고 살아내기 위해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데, 과학적인 논쟁에 매몰되는 순간 우리는 이러한 사실은 잊어버리고 만다. 그게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획하신 것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사실 전생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다. 사후세계의 문제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세계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고, 이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 수도 없었던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은 지옥에 가냐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나도 모른다'이다. 지금 현재 이 땅에서도 마찬가지, 교회에 다니면서 다니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이기적인 사람들을 보며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을 나도 이해하는데 전지전능한 신이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이상하지 않나? 무엇보다 성경은 사후세계에 대해 디테일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우린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이런 생각에 혼란을 야기한 건 넷플릭스에 있는 '서바이빙 데스'라는 다큐였다. 실제 취재에 기반해서 작성된 같은 제목의 책의 내용을 취재를 통해 영상에 담은 이 다큐의 마지막 편에는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 케이스를 연구하고 있는 미국에 있는 의대 교수의 이야기를 다룬다. 전생을 신앙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연구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아이가 설명하는 내용을 종합해서 실존했던 사람을 특정하고, 그 사람 본인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내용까지 아이들이 말하는 케이스들을 보면 '전생은 절대 없어'라고 가졌던 생각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시리즈 영상 말미에, 자신의 아이가 전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보고 신앙에 영향이 있냐는 한 아버지에 대한 질문에 그 아버지는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 다큐를 본 뒤에 관련 서적들을 본 뒤에도 내 결론은 '흥미로운데 우리가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였고, 생각해 보면 성경에는 전생과 후생을 포함한 사후세계에 대해 아예 침묵하고 있기에 그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할 필요가 없더라.


다만, 우리가 이 지점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전생과 후생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 삶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전생과 후생을 인정하는 종교는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라고 답안을 제시한다. 그러한 주장은 검증된 게 아니고, 그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없다. 그리고 개신교적 관점에서 성경은 그 지점에 대해 '인간이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영역이니 지금 주어진 삶에 집중해라'라고 말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러한 내용들은 내 신앙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창조론과 전생에 대한 얘기는 조금 먼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사주는 어떨까?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사주와 신점은 다르단 것이다. 신점은 말 그대로 귀신이 말해주는 것인 반면, 사주는 경험, 관찰, 철학 등이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되어 와서 만들어진 것으로 통계를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명리학은 사주에 대해 '확률적으로 이렇다는 것이고, 인생에는 다양한 변수가 많기 때문에 인생이 항상 이렇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개신교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사주'라는 것을 '하나님의 계획'으로 바꿔보자. 성경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계획이 있는데, 인간에게 그 계획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고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명리학과 개신교에서의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조화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그렇다면 왜 개신교에서는 사주를 보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그 지점에서 '인간의 본성'이라는 지점이 나온다. 명리학에서 사주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운의 흐름이 이렇게, 저렇게 흘러가고 그 사람의 성향에 대해 설명한다. 그 말을 듣거나 내용을 접한 인간은 어떻게 반응을 하게 될까? 성경에서 설명하는 인간의 본성에 비춰봤을 때 인간은 그런 내용을 접하면 그 내용에 구속되고 의존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그런 것에 구속되는 뿌리에는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 욕구와 욕망이 있다. 이것은 인간이 사주를 보고, 그걸 믿게 되면 그 과정에서 결국 자신의 욕구와 욕망에 잡아먹히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인간이 자신의 욕구와 욕망에 잡아먹히게 되는 순간 망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서 말해준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실현시키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질서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엄청난 희생을 하거나 행복하면 안 된단 것이 아니다. 사람은 모두 다르기에 우리보다 더 우리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놓으신 계획에 따라 우리가 살아갈 때 인간은 더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당장 보이지 않아도, 불확실해도, 신을 신뢰하며 주어진 것에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간의 길과 환경은 신이 알아서 해주실 것이니 자신보다 신을 먼저 생각하고 그를 위해 사는 것이 개신교와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이고, 모르면서도 그 길을 가는 것이 '믿음'이다. 개신교 신자에게 사주를 보지 말라는 것은, 인간이 사주를 보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순간순간 신이 아니라 그 내용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게 전부가 아닐 뿐 아니라 그렇게 사는 삶은 장기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욕구와 욕망에 잡아먹히게 되기 때문에 지양해야 한다.


교회들은 이러한 예민한 문제들을 피할 것이 아니라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해 주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교회, 특히 규모가 큰 교회들은 그런 문제들은 어떠한 고민, 연구도 없이 맹목적으로 강요하면서 정작 본인들은 자신들에 대한 부정적인 뉴스를 삭제하기 위해 임시조치를 하거나 자신의 권력, 명예, 돈을 위해 개신교적 표현으로 세상에 의지하고 타협한다. '복음'이 힘을 일어 가는 것은, 그런 교회와 회사원 목회자들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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