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영면
노란 유리 화병에 예쁜 프리지어 한 가지가 꽂혔다.
유리 공장에 견학을 가서 사 왔던, 작고 아담하지만 비대칭의 유려한 선형 화병은 신나게 집으로 걸어오신 다정한 아빠의 퇴근길을 담고 있었다.
뚝딱뚝딱 나무들이 켜켜이 쌓여있고 런닝셔츠 차림의 아빠는 땀을 뻘뻘 흘리시며 망치질을 하고 계셨다. 사택 뒤쪽의 산배경과 오며 가며 인사하는 이웃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던 몇 주. 그리고 우리 방에는 2층 침대가 들어왔다.
아직도 그 2층 침대의 나무 냄새와 신나는 흥분감이 잊히지 않는다. 동생과 번갈아가며 1,2층을 왔다 갔다 하고, 그 계단을 조심조심 밟고 내려오는 고사리보다는 조금 큰 동생의 신난 발가락이 눈에 선하다.
나는 꽃을 좋아한다. 꽃의 싱그러움과 피우기까지 애썼던 작은 생명을 보며 감탄한다. 좋은데 이유가 있을까 싶은 아름다운 창조물이다.
나는 퇴근길에 사 온 진주로 목걸이를 만들기 좋아한다. 피곤할 법해도 아이들을 재우고 새벽까지 만들며 지새운 불금은 내게 큰 에너지가 되었다.
우리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초등학교 때는 30센티 자를 대고 글자를 반듯하게 쓰는 연습을 함께 했고 중고등학교 때는 빈 지갑 안에 용돈과 편지를 발견하기도 했었고 대학 때 홀로 서울살이 중인 딸에게 부쳐온 커다란 박스의 간식거리 사이에 A4용지 3-4장의 편지. 처음에 그 편지를 차곡차곡 모았었는데 몇 번의 이사를 하면서 나중에 또 편지 쓰면 되지 하며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던 어리석은 20대도 고스란하다.
그런 아빠가, 그런 나의 아빠가. 세상을 떠나셨다.
아빠는 암이셨다.
갑작스러운 아빠의 암 판정. 그리고 시작된 2년간의 투병 생활. 나의 꽃은 색을 잃었고, 나의 몸은 무의식의 이끌림으로 살고 있었다. 그 과정에 가족들의 돌봄에 직접 간호도 못하고 곁에만 맴돌았던 나인데 이 감정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되레 나는 아파버렸다.
의료파업 직전, 나는 수술을 받았다. 아빠가 생사를 오가던 병원 옆 병원에서. 이 사실도 모르셨던 아빠. 엄마만 잠시 오셔서 괜찮은지 보시고 다시 아빠로 가셨다. 이게 무슨 일이람. 그렇게 나는 수술 후 일주일 입원을 했고 일주일은 병가를 내고 아빠를 뵈러 매일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벚꽃을 좋아하는 아빠를 모시고 꽃을 보러 나섰다. 의사 선생님도 왜 아빠의 상태가 좋은지 설명할 수 없지만 나선다면 지금 다녀오세요, 허락을 받았다. 아빠가 좋아하는 여의도 윤중로는 못 갔지만 너무 좋아하셨던 아빠의 미소와 따뜻한 손이 여전하다. 그리고 그 병가가 끝나는 날, 아빠는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