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너무나 넓은 바다였다. 멋지게 몰아치는 파도도, 잠잠한 수면 아래 간직한 꼬물꼬물 생물들도 모두 품었던 바다다.
가만히 마음 속 바다를 간직하고 먼 길을 떠난 아빠의 가만히 토닥였다. 너무 힘든 길이었다고. 병마로부터 자유를 지키려 애썼던 그 과정이, 너무 힘든 길이었다.
이상 징후를 확인하고 대학병원에서 항암차례의 과정을 지나 조혈모세모이식까지 잘 지나왔는데. 정상 세포들이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갔다.
혈소판 수치는 바닥을 치고 코피조차 응급상황이 되어 가족들은 하루하루 응급상황에서 살았다. 주진료를 진행했던 대학병원에서도 T세포가 사라지지 않았다고. 그래서 그 다음 항암을 진행하기 위해서 체력회복을 해야했고 하지만 집에서만 생활할 수는 없었다.
보다 나은 관찰과 식이를 위해 한방병원에도 입원하셨고 부작용으로 이와 눈이 검사를 요하고 치료를 시작하였다. 그래도 아빠는 잘 지나가고 계셨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경과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호스피스병동으로 옮기시는게 좋겠다고.그리고 생전에 연명계획서를 요청받은 아빠는 웃으시며 얘기하셨지만 얘기를 맺은 후엔 눈물을 흘리셨다. 손을 잡고 토닥였다. 마음에선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아빠와 함께 울 수가 없었다.
혈소판 수치 저하로 그리고 산소포화도가 떨어지면서 입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간병을 위해서도 나았다.
병원 생활 직전까지 드시고 싶은게 있으시면 함께 먹으러가고, 아이들을 데리고 뵈러 가고. 꽃을 보러 가고 싶으신 그 마음을 알아 산소통을 메고 휠체어를 끌고 의사의 허락을 받고 나갔다.
찾아 나섰던 킹크랩도, 엄마 몰래 드시고 싶은걸 마음껏 먹을 수 있어 너무 좋다며 찡긋하셨던 뷔페도, 그리고 마지막 함께 봤던 그 벚꽃을 보던 아빠의 표정도 모두 따뜻했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아빠의 걸음걸이는 느려졌고 힘이 없어졌다. 하루하루 병원생활이 쌓일수록 섬망증이 시작되었다. 그 하루하루를 싸우는건 아빠 그리고 함께 곁에서 버텨주시는 엄마였다. 고집스러운 아빠의 성격은 참지 못하고 나왔고, 병원 생활은 날이갈수록 엄마에게 큰 무게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빠의 병환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너무 큰 슬픔이 나를 덮쳤고 떨쳐낼 새 없이 쌓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힘들면 얼마나 힘들다고 하며 무감각해지더니 이내 몸이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아빠를 낫게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나는 나를 자책했던 모양이다. 작년 8월 건강검진에서도 뭐 하나 나온게 없더니 하반기부터는 자잘하게 아프더니 제자리암판정을 받았다. 신규암이라니, 헛웃음이 났다. 그리고 수술을 했다.
수술을 마치고 5일간의 입원 중에 아빠를 보러갈 수 없었다. 면역력이 너무 떨어져 있던 터라,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많이 기도했다. 제발,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에는 아빠, 가지 말라고. 사실은 아빠가 그냥 떠나실까봐 너무나 겁이났다. 그래서 더 잘 먹고 더 잘 쉬고 더 잘 낫기에 애썼다. 그러다 고개를 드니 벚꽃이 만발해 있었다.
꽃아, 떨어지지 마라.. 아빠가 너를 보러갈 때까지 제발 떨어지지 말아라.
꽃아, 떨어지지 마라. 내가 아빠를 보러갈 때까지 제발 아빠를 데려가지 마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