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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튼 May 14. 2023

시간 부자

삿포로 한 달 살기-1

#1


삿포로에 도착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비행기 타는 시간은 2시간 45분 밖에 안되었지만, 엄격한 수화물 규정을 지키느라 짐을 덜고 무게를 재어보는 과정을 거의 1시간가량 했다. 15kg 화물 규정을 어찌어찌 마치고 4시간 정도 수면을 취한 뒤 5시 반에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비행기에서 내내 두통에 시달렸다. 공항에서 숙소로 오는 길에도 차멀미를 심하게 해서 울렁거리고 메스꺼운 느낌 때문에 불쾌했다.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는 산 중턱에 있었다. 분명히 구글 지도를 보며 시내와의 거리를 보고 예약했는데, 산중턱인 줄은 몰랐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숙소로 향하는데 군의관 훈련소 시절에 잠깐 경험했던 40kg 행군이 생각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숙소에 도착하니 오후 5시 정도였다. 한국에서 일본까지 장장 12시간이 걸린 여정이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는 자신을 ‘요코’라고 소개하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냐고 물어보길래, 버스정류장에서부터 걸어왔다고 말하니 놀라서 자빠지는 제스처를 취했다. 왜 픽업 요청을 안 했냐고, 오히려 본인이 자꾸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연발했다. 걸어올 만했다고 말씀드렸지만 자꾸 죄송하다고 하셔서 오히려 우리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우리의 숙소는 너무 마음에 들었다.


특히 욕실.

일본의 가정집은 목욕에 진심인 듯했다. 욕조에 많은 버튼들이 있는데, 누르면 알아서 욕조가 따뜻한 물로 가득 채워지고 온도 또한 섬세하게 조절할 수 있었다. 목욕탕 내에는 훈훈한 히터도 켤 수 있는 버튼도 있어서 추운 겨울날에도 끄떡없었다. 긴 이동을 마치고 따뜻한 물에 들어가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저녁에는 요코상과 함께 마트로 장을 보러 갔다. 가기 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녀는 뉴질랜드 남편과 주말 부부이신 듯했다. 아들은 호주 시드니에 있었고, 큰 강아지와 함께 에어비앤비를 운영하고 있었다. 특히 그녀는 한국드라마와 한국음식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드라마 ‘동이‘를 즐겨본다고 했다. 그녀는 한국의 왕들에게 관심이 많다며, ’전하’가 왕을 뜻하는 말이냐며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이’가 허구의 인물 아니냐고 물어보는 나의 헛소리에 동이는 ‘숙종의 3번째 부인으로 영조의 어머니’라고 또박또박 설명하여 우리를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자신은‘기무치’(일본 말로 김치를 일컫는 말) 를 너무 좋아한다며 마트에 가면 꼭 기무치를 먹어보라고 한국 사람인 우리에게 권했다.


마트에서 파는 초밥으로 저녁을 먹고 요코상이 추천한 기무치를 맛보았다.

뭔가 웃음이 나오는 맛이었다.

맛있었는데, 내가 어렸을 적 부터 먹어오던 김치와는 많이 다른 맛이었다. 맵기보다는 달달한 배추 겉절이 같은 느낌이랄까.

기무치와 초밥을 같이 먹었는데, 이건 무슨 국적 불명의 조합인가 싶었다.


# 2


마트에서 사 온 빵으로 아침을 대충 때우고 숙소 근처 산책을 했다. 숙소 근처에는 ‘마루야마 동물원’이 있었다. 초등학교 이후로 거의 20여 년 만에 다시 가본 동물원이었다.

동물원에서 한가롭게 노닐며 내가 진정 꿈꾸던 것은 이런 것이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다음에 무엇을 할지 정해져 있지 않는 삶’


한국에서는 오히려 무언가 정해져 있지 않으면 그렇게 불안하고 초조했는데, 오늘 나에게 아무런 일정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이런 아무런 계획 없는 삶이 1년간 주어지는 사실이 나에게 커다란 기쁨으로 다가왔다. 사실대로 말하면 동물원은 그렇게 볼게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세먼지 없는 하늘과 서늘한 바람을 쏘이며 문득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3


15kg이면 충분했다.


4일 여행 가는 데에 이것보다도 많은 짐을 가지고 간 적도 많았던 거 같다.

1달 살기를 할 거라 일부러 편한 옷, 함부로 입어도 될 옷들만 가지고 왔다. 짐은 훨씬 줄었는데  자유로운 기분마저 들었다.

더 짐을 줄일 수도 있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왠지 부질없게 느껴졌다.

차도 없도 없어서 모든 도보로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데 불편하다는 생각보다는 천천히 주변 구경을 해서 좋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이곳에서 나는 서울에서보다 훨씬 부자다.

‘시간 부자’


서울에서는 분단위 초단위로 시간을 써도 모잘랐던 시간들이 여기서는 그렇기 않았다.

생각해 보면 차 안에서 버리는 시간들이 얼마나 많았나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옷을 사기 위해 허비했던 시간들은 또 얼마나 많았나

체면을 차리기 위해 허비했던 시간들은 또 얼마나 많았나


나의 행복을 위해 진짜 필요한 게 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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