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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튼 Nov 13. 2023

나는 이제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겠어

페루-와카치나 호수 마을 

와카치나 호수에서 와이프가 나에게 이야기했다. 


“호수가 너무 예뻐서 이곳에 오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별로 인 것 같다. 버기카 투어도 너무 어지럽고, 힘들고. 나는 이제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겠어.” 




와이프와 나는 모두 장남, 장녀이다. 대한민국의 장남, 장녀라니 무언가 많은 것을 설명해 주는 말이다. 사실 내가 어디에서 장남이라고 하면 모두 놀랜다. 누나만 위로 둘 있을 것 같은 막내아들 느낌이라고. 사실 이 말이 딱히 듣기 싫은 것도 아니다. 철이 없는 것은 맞는 이야기니까. 


사실 나도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지옥 같은 고3이 끝나고 대학에 입학할 때 아버지는 나에게 법대에 진학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셨다. ‘장남인 네가 법대에 들어가서 훌륭한 판검사가 되어서 집안을 길이길이 빛내야 한다’는 이야기. (내가 써놓고도 너무 웃긴다) 


내가 의대에 갈 거라고 하였을 때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었다. 왜 너는 훌륭한 법조인이 될 수 있는데 그 길을 ‘포기’하냐고. 나는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평생 내가 일종의 ‘루저’가 아닌가 하는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결국 의대를 일 년 휴학하고 아버지의 말처럼 훌륭한 법조인이 되기 위해 다시 재수를 선택한다. 이때 나는 나의 욕망이라는 것에 대해 아주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힘든 재수를 하면서 수 없이 나에게 되물었다. ‘도대체 나는 왜 여기 있는 걸까?’ 하고, 재수학원에서 만난 친구들은 모두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데 나는 왜 이런 물음에 시달려야 할까? 왜 나는 고3 때처럼 무언가에 매진할 수 없는 것인가? 하고 또다시 지독한 자기혐오에 시달렸다. 재수 중반, 나는 어떤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그저 아버지의 욕망의 대리인에 불과했구나. 


이때 참 많이 힘들었다. 내가 이제까지 노력해 온 그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판검사가 되고 싶었고, 서울대에 입학하고 싶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고 ‘믿었는데’. 이때 참 아버지도 밉고 어머니도 미웠던 것 같다. 이게 벌써 18년 전 이야기이다. 




아무튼 나는 아무것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로 다니던 학교에 복학한다. 의대는 말이 대학교지 고등학교와 똑같은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었다. 2주에 한 번씩 시험을 보고 9시부터 5시까지 빽빽한 스케줄. 친구들은 강의신청 힘들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것도 해본 적이 없다. 의대에서는 모든 게 정해져 있고 나는 학교에서 제시한 일정 기준에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만 하면 되는 구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항상 유급의 불안함과 시험의 압박이 있었지만, 그게 또 어떤 면에는 좋았던 것 같다. 나를 뿌리 깊이 짓누르는 한 가지 질문 


“너는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인생을 살고 싶냐” 


는 그 무시무시한 질문에서 도망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가장 먼저 아버지가 떠올랐다. 나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는다. 아버지 세대에서는 자식에게 자신의 꿈을 이루기를 희망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시대였고 (지금도 그런 듯 하지만), 아버지도 나의 미래를 위해 많은 희생을 하신 것은 사실이니까. 나도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었던 것뿐이다. 나도 아버지의 욕망을 욕망했고, 아버지도 가스라이팅을 ‘사랑’이라고 생각하셨던 것뿐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이것을 깨달았을 뿐이고.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흔하디 흔한 비극이라고 할까. 


덕분에 나의 반항은 현재 진행형이고, 아직도 나는 나의 욕망에 대해 깊은 생각부터 하게 된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가?’ 


아내가 나에게 그 말을 했을 떼, 나는 그녀가 어떤 생각인지 너무 잘 알아서 꼭 안아주고 싶었다. 내가 와이프와 함께하고 싶었던 이유 중에 하나이다. 그녀와 나는 너무 많은 공통점이 있다. 그게 사실 너무 측은하다. 




이민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있다. 한국에 있으면 도대체 ‘나’라는 사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물음 자체가 굉장히 쓸데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동산과 주식, 높은 연봉을 얻기 위해 정보가 아니면 그 무엇도 의미 없는 것 같았다. 의대 15년이 끝나고 나는 또 세상이 정해 놓은 그 숙제를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었다. 


이 여행은 나에게 일종의 반항이다. 


철이 없어도 너무 없지만, 나는 좀 알아야겠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어떤 건지. 




여행이 이제 6개월째 접어들었다. 이제 이민은 생각하지 않는다. 무작정 싫었던 부모님과 나의 조국이 그립다. 이제는 안다. 그 분들은 그 분 나름의 방식의 사랑을 주었고, 나의 조국은 책임도 주었지만 동시에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선물로 주었다는 것. 

본인 인생의 손잡이를 거머쥐고 남이 뭐라 하든 당당히 걸으면 되는 일인 것이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같이 고민해주고 싶어졌다. 너무 이상한 말이지만, 우리 부부는 아직도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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