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 하오(H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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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은 오리엔테이션 시간이었다. 옵서버쉽 프로그램에는 다양한 나라에서 참여하였다. 인도에서 세 명, 브라질에서 둘, 콜로비아에서 한 명, 페루에서 한 명, 중국에서 한 명 그리고 한국에서 온 나까지 총 9명이었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비슷한 피부색끼리 짝을 이루게 되었다. 인도에서 온 아이들은 심지어 같은 동네 선후배 사이이기도 해서 서로 굉장히 놀라는 분위기였다. 나는 중국에서 온 아이 옆에 자연스럽게 앉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게 사교적인 성격이 아닌지라 오리엔테이션 내내 쭈뼛했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먼저 말을 걸어보았다.
“어디서 왔니?”
“중국에서 왔어”
“중국 어디?”
“#&@#%”
내가 못 알아먹으니, 그냥 베이징 근처의 작은 도시에서 왔다고 설명해 주었다. 자신을 “하오(Hao)”라고 부르라고 했던 그는 사실 이번에 미국 레지던트에 지원한 상태였다. 옵서버쉽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피츠버그와 휴스턴에 이어서 3번째 병원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뭔가 노련해 보였다.
“미국 레지던트에는 왜 지원하게 되었니?”
하오는 조금 주저하더니 이야기했다.
“중국의사 월급으로는 베이징에 집을 살 수 없어. 내가 전에 있던 병원에 한국 의사 선생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던데 너도 같은 생각이니?”
이때부터 하오에게 급속도로 친근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왠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삶의 고단함이랄까. 나중에 다른 친구들과도 말을 트고 교류하게 되었지만 ‘하오’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동아시아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남미와 인도아이에게서 느낄 수 없는 특유의 입신양명의 꿈이랄까? 그런 것들이 느껴졌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했다면 하오를 굉장히 치열하고 욕심 많은 아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또 그렇지도 않았다.
이게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각자 숙소로 돌아가는데, 하오가 열심히 구글지도를 검색하고 있었다. 나는 좀 더 이야기해보고 싶은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찾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건 아니고 가장 가까운 “해변”을 찾는다고 했다. 사실 나는 렌터카를 했기 때문에 내가 차로 데려다줄 수 있다고 했고 하오도 조금 고민하더니 승낙했다.
드라이브를 하면서 “왜 해변에 가고 싶냐”라고 물었다
“나는 해변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갑자기 하오에게 굉장한 측은지심 같은 것이 몰려왔다. 물론 중국은 한국에 비해서 비교할 수도 없이 큰 나라이기 때문에 해변이 멀리 떨어져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대한민국 해군 대위 출신인 나에게 바다를 못 봤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병원 근처에는 ‘도그 비치’라는 조그만 해변이 있었다. 물론 예쁜 해변이었지만, 진짜 해변이 아니라 뭔가 인공적인 느낌이 드는 해변이었다. 하오는 그 해변을 보고는 너무 예쁘다며 연신 사진을 찍어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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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오를 두 번째 만난 것은 다음 날 점심시간이었다. 나는 한국 토종으로 열심히 영어공부를 했다고 하지만 원어민들의 진짜 대화를 듣고 커다란 문화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왜 이렇게 빨리 이야기하고 모르는 표현은 왜 이렇게 많은 건지. 한국에서 나와 대화해 주었던 영어 선생님들은 모두 나의 영어를 견뎌주고 참아주었던 것뿐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오에게 점심시간 때 잠깐 볼 수 있냐고 물었다. 그는 옵서버쉽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뭔가 많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오. 영어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받아 정말 하나도 못 알 먹겠어”
하오는 사실 자기도 비슷하지만, 중요한 것은 환자와 ‘소통’이 가능하느냐지, 완벽한 영어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다독였다. 나보다 10살이 어리지만 산전수전 다 겪어본 어른 같은 하오가 대단해 보였다.
난 그 이후에도 여전히 원어민들끼리 대화하는 것은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하오의 말이 굉장히 위로가 되었다. 유튜브에서 미국에서 의료인으로 활동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영상을 찾아보았다. 첫 일 년은 너무나 힘들고 그 후로 조금씩 나아진다고 하였다. 근데 겨우 첫날이었다. 오히려 내가 너무 자만했고 앞으로 영어 공부의 방향성에 대해 큰 가르침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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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택한 소화기 내과와 다르게 하오는 병동에서 환자를 캐어하는 파트를 선택하여서 스케줄이 서로 맞지 않을 날이 많았다. 하오를 다시 본 것은 옵서버쉽이 중간 정도 지났을 무렵의 병원 안의 스타벅스였다.
하오는 자신이 지원한 병원들에서 인터뷰 요청이 아직 안 왔다며 조금 시무룩해있는 상태였다. 사실 요새 인도, 필리핀 등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국가에서 엄청난 지원자들이 몰리는 상황이라 지원서 검토에만 시간이 엄청 드는 듯했다. 하오는 나에게 너는 미국 병원에 지원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도 그런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미국에 와보고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왜 하필이면 내과를 선택했냐고 물었다.
“나는 암 관련 연구를 하고 싶어. 논문도 많이 쓸 거야.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더라도 좋은 경력이 될 것 같아”
하오는 USMLE에서 상당한 고득점자였다. 점수로만 따지면 상위 10% 정도 드는 상태로 미국 시민권자라면은 원하는 과를 마음껏 골라갈 수 있는 상태였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나는 어느샌가 “연구”라는 말을 들어본 지가 오래되었다. 그렇다. 사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연구를 하는 ‘과학자’이기도 했다. 학생 때는 연구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도 꽤 있었는데, 그런 아이도 모두 생업전선에 뛰어든 상태였다.
하오의 꿈을 응원해주고 싶어졌다. 미국에 혈혈단신 혼자 와서 씩씩하게 4달 넘는 병원생활을 하고 있는 그를 보면 의학계에 큰 획을 그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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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 하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다행히 하오는 캘리포니아의 한 병원에서 인터뷰를 받았고 긍정적인 답변을 받은 상태였다. 뭔가 내 일처럼 기뻤다. 그는 만약에 레지던트에 합격하게 되면 중국 근처 국가를 잠깐 여행할 거라고 했다. 나는 꼭 서울에 놀라오라고 했다.
“사실 미국 말고는 해외에 가본 적이 없어. 싱가포르나 도쿄를 생각하고 있는데, 꼭 서울에 들를게”
그가 진짜 서울에 들를지는 알 수 없다. 나보다 10살이 어리지만, 목표를 설정하고 묵묵히 앞을 향하는 그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