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승리자를 마주하는 방식
1910년대 세계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시대였다. 열강들은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만들며 땅따먹기 경쟁을 하였고 더 다다를 곳이 없자 주인 없이 남은 땅. 남극대륙에 주목한다.
당시는 황혼기에 접어들었어도 아직 대영제국의 시대였다. 비록 북극은 선두를 빼앗겼지만 남극만큼은 먼저 정복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충만해 있었다. 영국은 어니스트 섀클턴의 도전 후 마침내 1910년 6월 15일 스콧을 대장으로 하는 탐험대가 남극대륙을 향해 나섰다.
이 시대는 또 탐험이 시대이기도 했다. 이제 막 독립한 노르웨이에는 탐험가 난센이 있었고 이미 북대서양에서 알래스카에 이르는 북서항로를 처음으로 개척하여 이름을 날린 아문센이 있었다. 아문센 역시 1910년 8월 9일 남극대륙을 향해 출발한다.
열흘 차이를 두고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두 탐험대는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아는 정도가 아니고 남극대륙 도착 후 남극점 정복에 나서기 전 몇 달 동안 각각의 베이스캠프 간 교류도 진행되고 있었다. 이윽고 아문센은 10월 20일 남극점을 향하여 출발하고 스콧은 11월 1일 베이스캠프를 출발한다.
이들은 서로 남극점에 도착할 때 혹시 상대방의 깃발이 먼저 보이는 것이 아닐까 초조해했었다. 결국 1911년 12월 14일 오후 3시. 아문센 탐험대가 인류 최초로 남위 90도 남극점에 도착한다. 이누이트족의 전통을 잘 활용하고 겨울철에 보다 친숙한 아문센 탐험대의 승리였다.
1912년 1월 16일 스콧은 본인들이 경쟁에서 진 것을 알아차린다. 하지만 그들은 마침내 1월 18일 남극점에 도착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다만 두 번째 도착자였던 것이다.
1월 16일
"캠프 68, 고도 2974m. 최악의 일이 일어났다. 우리는 검은 점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썰매 축대에 묶인 검은 깃발이었다. 부근에는 캠프 흔적과 썰매 자 국, 스키 자국, 개 발자국이 있었다. 노르웨이인이 먼저 남극점을 밟은 것이다. 백일몽은 끝났다."
이후 그들은 마침내 남극점에 다다른다.
그리고 다시 귀환하는 길. 일기는 이어진다.
2월 6일
"무서워진다. 우리는 사스트루기 지대에서 점심 텐트를 쳤다.
유일한 위안은 서쪽이 더 잘 보인다는 것과 내려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뿐이다."
2월 17일
"기면서도 썰매를 끌던 에번스가 끝내 죽었다. 얼음 속에 그를 묻고 우리는 떠났다.
심한 동상으로 신음하면서도 죽을 때까지 썰매를 끌던 에번스! 신이여 그를 보살펴 주소서."
3월 3일
"하느님 우리를 도와주소서. 이 상태에서는 더 이상 썰매를 끌고 갈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아침에 신발 신는 것이 점점 더 느려지고 있다. 그리고 매일 조금씩 더 위태로워지고 있다."
3월 17일
"남위 79도 50분. 가엾은 오츠는 슬리핑백 속에서 자기를 버리고 가라고 하소연했다. 얼마 뒤 그는 잠깐 나갔다가 온다면서 텐트를 나갔다. 우리는 그가 눈보라 속으로 하염없이 걸어갔음을 알고 있다. 병든 몸이 동료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죽음을 찾아갔음을 누가 모르랴. 그러면서도 모른 체한 우리 마음을 하나님은 아시리라. 그가 겪은 동상의 아픔을 그의 아름 다운 마음과 용기가 깨끗이 씻어 주기를."
(미확인이나 일기에는 로렌스 오츠의 마지막 말을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잠시 밖으로 나갔다 오겠습니다.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1912년 3월 29일
".. 우리는 상황이 호전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버틸 것이다. 죽음이 머지않았다.
안타깝지만, 더 쓸 수 없을 것 같다.
신이시여, 부디 뒤에 남은 사람들을 보살펴주소서! R 스콧"
스콧은 사후에 영국에서 넬슨과 비견되는 영웅이 되고 1등보다 더 훌륭한 2등이라며 추앙받았다. 지금도 흔히 1등만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말할 때 인용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전 세계가 왜곡된 민족주의로 들끓던 시대, 노르웨이와의 남극점 정복 경쟁에서 진 패권국가 영국은 의기소침했지만 사후 수개월 뒤에 발견된 스콧의 일기와 유품, 그리고 그들의 장엄한 죽음에 의해 자부심을 다시 챙긴 것 같았다.
영국인들은 스콧과 부하들이 눈 속에서 하나둘 죽어 가는 모습을 적은 스콧의 일기에 감동하고 그들의 의지를 찬양하며 꼿꼿한 기개를 자랑스러워했다.
눈앞에 다가온 최후. 스콧은 조용히 펜을 들었다. 그리고는 영국에 있는 탐험대 회계 책임자에게 역사에 길이 남을 비장한 편지를 썼다.
"우리는 신사처럼 죽을 것이며, 불굴의 정신과 인내력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겠다.... 우리가 살아난다면 모든 영국인들의 가슴을 뒤흔들 탐험대의 용기와 인내를 말해줄 수 있을 텐데.... 이 짧은 글과 우리의 시체가 그 이야기를 대신해줄 것이다. "
마지막 차 한 잔을 나누어 마시고 세 사람은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 일기는 3월 29일로 끝나 있었다.
*영국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을 다룬 책 [인 듀얼 런스] 인용
하지만 영국인들은 살아 돌아온 아문센을 야만인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죽어서 돌아오지 못한 스콧은 문명인이고 신사라고 치켜세웠다. 처음에는 아문센이 승리한 것을 알고 스콧 이야기는 입에 담으려 하지도 않았던 그들이었다.
영국이 자랑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소개되는 사람은 거의 모두가 사진도 함께 실리지만 탐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노르웨이인 아문센을 영국인들은 사진 한 장 없이 6분의 1쪽 분량으로 간략히 소개했다. 그러면서도 브리태니커는 남극점 도달 경쟁에서 패한 영국인 스콧은 사진과 함께 3분의 1쪽 분량으로 소개했다.
훌륭하고 당당하게 최초에 남극점에 다다른 아문센에 대한 명백한 폄하였다.
브리태니커에는 남극점에 사상 최초로 우뚝 선 아문센의 사진은 없었다. 그는 유럽인들이 400년이나 개척하려고 애쓴 북서항로를 처음 통과했고, 남극점에 처음 도달했으며, 북극해를 처음으로 가로질러 비행했다. 게다가 사후엔 피어리가 아닌 그가 북극점에 최초로 다다른 사람임이 밝혀져 남북극을 동시에 정복한 최초의 인간으로 기록되고 있다.
무엇보다 1등을 위해 부정행위를 한 것도 아니고 더구나 뒤에 올 스콧 탐험대에게 식량을 남겨주기도 했으며 나중엔 조난당한 동료를 구하기 위해 북극으로 갔다가 실종된 사람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하루 이야기 #1 패배자를 기억하는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