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털 도둑>, ‘코뿔소 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어쩌다 희귀 깃털이 하나씩 나타나면 너도나도 달려드는 다른 플라이 타이어들처럼 그도 깃털이라는 마법에 빠져 있었다. (p.313)
- 커크 월리스 존슨, <깃털 도둑> 중 발췌
한낱 깃털이 죽음의 이유가 되었다면 믿으시겠어요?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답은 갈릴 것입니다. 깃털의 주인이 인간이면 탄식할 테고, 인간이 아닌 새라면 아마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수도 있지’라고 수긍하겠죠.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깃털 도둑>은 ‘깃털’로 위시되는, 자연을 향한 인간의 탐욕을 그려낸 책입니다. 소설인 줄 알고 집어 들었던 책이 실은 논픽션이었고, 책에 담긴 모든 내용이 사실이라는 걸 깨달으며,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욕심에는 정말 끝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깃털 도둑>은 제목 그대로 깃털을 훔친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영국 자연사 박물관에 버금갈 정도로 다양한 조류를 보유한 트링 박물관에 침입해, 무려 299마리의 새 표본을 훔쳐 간 한 미국 유학생의 사건을 다룬 책이죠. 책은 시간순에 따라 총 3부로 나뉘는데, 1부에서는 새들이 생물지리학자 및 수집가들의 손을 거쳐 박물관에 들어오게 된 과정을, 2부에서는 새를 도둑맞은 사건을, 3부에서는 도난당한 새들을 쫓는 저자의 추적 과정을 서술하고 있었습니다. 3개의 챕터는 ‘깃털 수집과 도난 사건’을 시간순으로 열거했다는 연속성 외에도 공통되는 주제가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자연의 희소성과 아름다움 앞에서 발현되는 인간의 이기심과 잔인성’입니다.
일반적으로 동물 채집이나 수렵 등을 생각할 때 ‘깃털’을 제일 먼저 떠올리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녹용이나 코뿔소의 뿔, 코끼리의 상아, 맹수의 가죽 등 밀렵꾼들에게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안겨 주는 상품들을 제일 먼저 생각하기 마련이죠. 하지만 <깃털 도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노리는 건 덩치 큰 동물이나 값비싼 건강식품이 아닌, 아주 작은 새들의 아주 아름다운 깃털입니다. 깃털을 노리는 이유는 시대에 따라, 깃털을 갈망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깃털 도둑>이 가장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는 ‘플라잉 타이’입니다. 이름조차 생소한 플라잉 타이는 플라이 낚시에 사용하는 미끼인 루어(lure)를 만드는 방법 중 하나로, 깃털과 틴셀, 와이어 등 주재료로 사용하는 공예의 일종입니다. (본래는 연어나 송어 등을 낚을 때 필요한 미끼를 만드는 고전적인 방법 중 하나였지만, 현대에 와서는 낚시를 하지 않는 이들도 대다수 참여하며 공예의 한 장르로 소비되고 있다고 해요.)
플라잉 타이의 주재료는 깃털이며, 플라잉 타이 하나를 제작하는 데는 주로 7-8개의 깃털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때 사용되는 깃털은 전부 ‘진짜’ 새에게서만 채취할 수 있는 ‘진짜’ 깃털들이죠. 물론, 대부분의 플라잉 타이에서는 닭이나 오리 등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깃털을 여러 색깔로 염색하여 사용하지만, 사람의 욕심이 어디 ‘손쉬운 주변 재료’에서만 그칠까요.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하얀색, 회색, 검은색, 갈색보다 더 화려한 깃을 가진 새들이 넘쳐나는걸요.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좀처럼 절제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죠. ‘희귀함, 희소함, 레어’라는 단어에는 듣는 순간 주체할 수 없게 하는 마성의 힘이 있습니다. 수집가들에게 이러한 마력은 더더욱 배가 되어 발휘되죠. 플라잉 타이어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깃털로 공예하는 예술가인 그들에게 깃털은 가치와 신분을 증명하는 하나의 수단 중 하나였습니다. 더 좋은 깃털을 소유할수록 선망의 대상이자 관심의 중심이 되었죠. 좋은 깃털을 소유하는 것은 좋은 손재주를 가지는 것만큼이나 그들 세계에서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좋은 깃털을 소유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 전 세계의 새들 중 아름다운 깃털을 가진 종들은 대부분 멸종에 임박할 정도로 말살되었죠. 당시는 유럽이 깃털에 열광했던 광란의 시절이라, 당시 귀부인들이 모자나 가방에 새를 한 마리 통째로 박제해서 얹고 다녔고, 신사라고 불리던 남자들은 플라잉 타이와 같은 여가 생활에 깃털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죠. 학자라 칭송받았던 이들 또한 연구라는 명목 아래 새들을 무분별하게 수렵해 자신의 이름을 건 연구를 발표했고요. 새와 깃털이 이렇듯 재력과 지성, 세련됨을 자랑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광기의 빅토리아 시대를 지나며 지구는 무수한 새들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폭풍은 현세대의 사람들이 감당하게 되었죠.
플라잉 타이어들이 다양한 깃털을 마음껏 구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CITES(세계 멸종 위기 야생동물 보호 규정) 때문에 과거 플라잉 타이에서 활발하게 이용하던 새의 깃털을 이제는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되었거든요. 빅토리아 시대 플라잉 타이 전문가들이 화려함을 위해 사용했던 코팅거나 채터러, 극락조의 깃털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재료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주 오래된 빅토리아 시대 모자나 박제품을 조상에게 물려받은 경우를 제외하곤 말이죠. 하지만 구할 수 없다는 건 수집가들에게 돌아가야 할 벽이 아닌, 넘어야 할 짜릿한 장애물이 됩니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게 인간의 묘한 심리니까요. 그래서 플라잉 타이어들 중 몇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깃털을 구하려고 도전합니다. 검은 시장에서 암거래를 하거나 밀렵꾼과 뒷거래를 하기도 하고, 표본 자료가 넘치는 박물관에 침입해 몰래 새 몇 마리를 빼돌리기도 하죠. 트링 박물관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299마리의 희귀종 새 표본을 훔쳐 달아난, <깃털 도둑>의 주인공 ‘에드윈 리스트’처럼요.
저자는 에드윈 리스트의 박물관 침입 사건을 통해 아름다움에 대한 소유욕과 집단 내 인정 욕구에 대한 집착이 한 인간을 어디까지 몰아갈 수 있는지를 그려냅니다. 자연을 제멋대로 다루어도 된다는 무의식적인 우월감이 인간을 얼마나 인간 이하의 존재로 만드는지 세세하게 묘사하죠. 하지만 책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에드윈 리스트’라는 인물을 치밀하게 파고들며, 비이성적일 정도로 허술한 미국의 사법 체계와 섬뜩할 정도로 계산적인 한 사람의 실체를 추리소설 형식으로 밝혀내죠.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도록 하겠습니다. 추리소설을 설명할 때 가장 무례한 행동이 바로 결말을 밝히는 일이니까요.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책을 직접 읽어 보시길 바라겠습니다.
<깃털 도둑>에는 분명히 잘못한 사람과 그 잘못을 뒤쫓는 사람이 존재합니다. 도둑이라는 죄명이 있는 사람과 그의 죄목을 추적하는 책이니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책에 등장하는 이들 중 완전무결한 사람은 어쩐지 한 명도 없어 보였습니다. 깃털을 도둑질한 에드윈 리스트, 사용하지도 않을 플라잉 타이를 위해 매해 수천 개의 깃털을 소비하는 플라잉 타이어들, 연구라는 명분을 앞세워 죽은 새의 표본을 쌓아놓고 보관하는 박물관 직원들, 그들이 보관하는 새의 표본을 처음 수집했던 빅토리아 시대 학자들, 학자들을 도와 새들을 사냥한 사냥꾼들, 사냥꾼들에게 깃털을 구매해 의복을 만들었던 깃털협회 제작자들, 그들의 상품을 소비했던 유럽 상류층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 플라잉 낚시가 취미인 저자까지. 리스트를 제외한 인물들은 전부 인간의 법체계 안에서는 어떠한 범법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전부 같은 죄를 저지르며 살아가는 듯 보였습니다. 바로 ‘환경파괴’라는 죄목 말이죠. 어느 시대를 살았든, 어떤 삶을 살았든 책의 등장인물들은 전부 필요 이상으로 생태계를 망가트리며 삶을 영위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죄목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이 단 한 명이라도 있긴 할까요?
플라잉 타이를 하든 하지 않든, 연구를 핑계로 동물을 무분별하게 채집하든 그렇지 않든, 박제된 동물들로 연구를 하든 하지 않든, 굳이 필요도 없는 생선을 취미로 죽이는 낚시를 하든 하지 않든, ‘자연 파괴’라는 죄목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분명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읽고 있는 이 글을 보이게 하는 스크린도, 스크린을 있게 하는 전기도, 전기를 만들어내는 발전소도, 전부 지구를 파멸로 이끄는 대표적인 주범 중 하나니까요.
한 대학생이 깃털을 훔쳐 간 가벼운 이야기에서 시작한 책이었지만, <깃털 도둑>의 결말은 참담하고 씁쓸했습니다. 실제로 책의 결말이 그리 밝지 않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행간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인류의 총체적인 나르시시즘이 마음을 자꾸만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환경을 위하며, 자연과 함께 발맞추어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오긴 할까요? 질문을 하면 할수록 할 말이 줄어듭니다. 차마 말할 수 없어 입을 다물게 됩니다. 인류가 더 이상 이 땅에 남아 있지 않을 순간이 도래할 때까지, 우리는 아마 오래도록 이 행성의 죄인으로 살아가게 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