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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달 모나 Monah thedal Aug 31. 2024

보통이 아닌 보통 독자의 서평

<어느 보통 독자의 책 읽기>, '옥상에 앉아'에서 우연히 만난

보통이 아닌 보통 독자의 서평, <어느 보통 독자의 책 읽기>, 버지니아 울프


솔직히 제목이 기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보통 독자의 책 읽기>의 저자가 버지니아 울프라니. 안나 윈투어의 ‘어느 보통 소비자의 옷 쇼핑’이나 고든 램지의 ‘어느 보통 손님의 식당 투어’처럼 앞뒤가 안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죠. 버지니아 울프가 어디 ‘보통 독자’입니까. 이름만으로도 이미 백 년이 넘도록 전 세계의 서점 매대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서점의 안방마님 아닙니까. 미니 북, 큰 글씨 책, 새 번역판 등 시대가 변함에도 굴하지 않고 유구하게 내려오는 작가의 글을 엮은 책에 ‘보통 독자’라는 제목이 붙다니. 진실한 ‘보통 독자’의 자리를 빼앗긴 느낌이었습니다. 아싸 자리를 꿰찬 인싸를 보는 느낌이었달까요.      


하지만 책을 넘기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몇 챕터는 놀라움이었고, 그 다음에는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뒤따랐습니다. 장이 거듭됨에 따라 점차 ‘버지니아 울프’로서의 후광이 사라지고, 인간으로서의 ‘버지니아’가 떠오르더군요. 역사가 기억하는 위대한 작가가 아닌, ‘버지니아 울프’라는 사람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서평 시리즈 4권 중 3편, <어느 보통 독자의 책 읽기>에서 버지니아는 가감이 없고 솔직합니다. 몇 편의 글만 읽어 봐도 그녀가 얼마나 유려하고도 진솔하게 생각을 펼치는지를 알 수 있죠.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인 디포나 대가의 반열에 오른 헤밍웨이도 그녀의 관점에서는 허점투성이 작가가 됩니다. 버지니아는 특히 헤밍웨이의 소설 속 인물들이 뚜렷하고 실속있게 그려진 것이 별로 없으며, 마분지처럼 납작하고(p.200), 자의식적으로 남성적이며, 재능은 확장적이기보다는 수축적(p.205)이라 비판합니다. 현대 페미니즘 비평에서 종종 나타나는 인물과 서사의 단편성을 무려 100년도 더 전에 지적했다는 걸 생각해 볼 때, 버지니아의 근대 여성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1910~20년대는 서구권에서도 여성운동이 이제 막 시작할 때였으니까요.     


하지만 단지 가치관에 관한 비평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녀는 몇몇 글에서 동료 작가들의 작품을 다루는데, 그 때마다 ‘동료 작가인데 이렇게까지 써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여과 없는 비평을 내놓곤 합니다. 평소 선호하는 작가, 몽테뉴나 토마스 하디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찬사와 따뜻한 묘사를 아끼지 않다가도, 조지 기싱이나 E.M 포스터에게는 거침없는 언사를 늘어놓습니다. 그녀는 조지 기싱을 은유보다는 사실을 내세우는 소설가로 묘사하며, ‘소설가가 되기로 한 것이 의심스럽다(p.142)’라는 말도 서슴지 않죠. 물론, ‘학습을 게을리하지 않고, 부족하지만 교양 있던 사람(p.149)’이라는 구절을 쓰며, 단점에 장점을 덧붙이기는 하지만요.    

 

동료 작가였던 포스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포스터의 소설에 대해 적은 그녀의 글을 읽다 보면, 그녀가 포스터를 얼마나 안타까워하고 있는지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글 전반에 걸처 포스터의 소설을 연대순으로 짚어 올라가며, 그녀는 포스터가 소설 속에서 얼마나 자신의 직분을 놓지 못하고 있는지를 지적합니다. ‘소설가는 설교자나 교사 진영과 순수 예술가 진영으로 구분되는데, 포스터는 동시에 양 진영에 속하려는 듯하다(p.213)’라면서, 뚜렷하게 사회비판적이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미적으로 뛰어나지 못한 그의 소설 특유의 ‘애매성(p.217)’을 짚어내죠.      


하지만 무조건적인 힐난만 하는 건 아닙니다. 단점을 짚어낸 뒤에는 ‘모든 경우의 상이한 측면을 덜 민감하게 의식하면, 오히려 어느 한 가지 점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p,219)’라는 조언을 함께 적습니다. 해를 거듭함에 따라 발전하는, 설교자 진영에서 해방되어 점차 ‘순수한 아름다움 속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p.220)’ 해방된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점점 더 드러내는 그의 성장을 응원하기도 하고요. 또한 비교적 최신작이었던 <하워즈 앤드>를 ‘걸작을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장점들이 녹아 있다(p,220).’라고 평하는 등 알을 한 겹 깨고 나온 그의 글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습니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작가라는 말도 잊지 않죠. 이렇듯, 진솔한 조언을 담은 그녀의 글에는 동료 작가의 발전을 진심으로 바라는, ‘버지니아’ 특유의 섬세하지만, 기교 없는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도 여럿 있었는데, 이는 개인적으로 버지니아 울프가 특히 인간적으로 느껴진 부분이었습니다. 그녀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 있다면, 그건 바로 ‘프랑스 문학을 찬미하고, 미국 문학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근대 영국 지식인에게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전형적인 당대 인텔리의 면모죠. 당시 프랑스는 예술의 중심지라 일컬어졌고, 미국은 영국에게서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니, 버지니아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단지 시대적인 산물이라고 보고 넘기기에는 그녀의 글은 어딘가 조금씩 불편합니다.      


그녀는 우선, ‘영국인이 아니라는 것이야말로 미국인이 되는 첫걸음이다(p.101)’라고 미국 문학의 정체성을 정립합니다. ‘영어’라는 언어적 공통분모와 식민지였던 역사가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문학적 모방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죠. ‘영문학’이라는 오랜 전통에서 탈피할 때 비로소 진정한 ‘미국 문학’이 주체성이 설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단지 이렇게만 볼 수 있을까요? 미국 문학을 평하는 그녀의 글은 일면 맞는 말이라 생각되면서도, ‘손윗사람의 거만함’으로 가득차 있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녀도 미국 문학이 최근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고 있고, 영국 문학이 오히려 미국 문학의 말을 빌려 쓴다(p.115)’라는 말을 적기도 하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미국을 ‘가르쳐야 할 후학’ 정도로 대한다는 인상은 지우기 힘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이미 미국과 영국과 똑같은 독립 국가가 되었음에도 미국을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글에서 명백하게 보이더군요.     


미국 문학의 당면 과제 중 하나가 ‘미국’만의 문학적 색깔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 옳은 말이며, 영국이 언어적인 공통성 때문에 미국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또한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말처럼 미국인들이 영국 문학을 읽으면 ‘자기가 알지 못했던 문명을 비추는 거대한 예술이 불러일으키는 수수께끼와 당혹감에 더 민감해(p.112)’지게 될지는 미지수입니다. 영국 문학이든 프랑스 문학이든 독일 문학이든 러시아 문학이든 당시 미국 작가의 관점에서는 엇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유럽 문학에서는 당시 미국에는 없는, 각국의 오랜 문화적 색채가 묻어났을 테니까요. 영국은 그중에서 미국과 언어를 공유하고, 역사적으로 좀 더 밀접한 느낌이 있는 정도였을 테고요. 버지니아 울프가 생각하듯, 그렇게 ‘필사적으로 독립해야 하는’ 대상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두 개의 자립적인 국가가 된 이상, 미국은 미국이고 영국은 영국일 뿐이니까요. 미국 문학에 대한 버지니아 울프의 글은 영국 지식인의 시대착오적인 자만심인 것이죠. 당대 사람이기 때문에 쓸 수 있었던 글이기도 하고요.     


‘당대 지식인’적인 면모는 영화와 관련된 글에서도 나타납니다. <영화>는 버지니아 울프가 당시 새로운 장르인 영화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글로, 1920년대의 주류 매체(문자, 책, 글)의 최전방에 서 있는 지식인이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우선 영화를 ‘다른 예술에 기생하는(p.229)’, 얄팍하고 밋밋한 장르로 묘사합니다. 당시 영화는 이제 막 떠오르는 산업으로, 현대의 영화와 비교했을 때 단면적이었고, 소설의 깊이감을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죠. 어쩌면 버지니아가 영화에 실망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영화는 버지니아의 글처럼 당시 영화는 ‘안나와 브론스키가 사랑에 빠지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복잡다단하게 심리 묘사 대신, 농염한 키스로 대체하는 게 대부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대단한 점은, 그런 단조로운 화면에서 가능성을 봤다는 점입니다. 영화의 한계를 정확하기 지적하는 한편, 영화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하기도 하죠. 그녀는 영화가 ‘장차 추상으로 이루어질 것(p.232)’이라 예언하며, 이렇게 덧붙입니다. ‘영화는 말로는 가능하고 오직 말로만 가능한 이 모든 것을 피해야(p.231)’ 하며, ‘생각을 표현하는 새로운 상징이 발견되고 나면 영화 제작자는 엄청난 자원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p.232)’라고요. 그녀의 말들은 100년이 지난 지금 봐도 상당한 혜안으로 느껴집니다. 미장센이나 몽타주 같은 개념이 자리 잡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스크린이 표현할 수 있는 미학적인 상징을 논하고 있었으니까요.      


<어느 보통 독자의 책 읽기>는 제목처럼 진짜 ‘어느 보통 독자’의 서평집은 아닙니다. 그러나 소설 비평론이나 작가론 등을 다루는 전문적인 비평집보다는 가볍고, 글의 주제도 다채로운 편이죠. 무엇보다 버지니아 울프만의 거침없는 솔직함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인상 깊은 책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책을 읽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버지니아 울프가 ‘위대한 역사 속 대가’가 아닌, 인간적이고 친근한 면모를 가진 사람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감정을 표출하고, 가끔은 분노하고, 좋아하는 것에 애정을 아끼지 않으며, 고지식한 부분과 현명한 구석이 공존하는, 과거 어느 때의 평범한 사람 말이죠. <어느 보통 독자의 책 읽기>라는 제목의 핵심은 아마도 ‘책 읽기’가 아니라 ‘어느 보통 독자’에 있는 듯합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누가 봐도 ‘보통이 아닌’ 독자이지만, 그녀는 <어느 보통 독자의 책 읽기>에서만큼은 우리와 크게 다를 것 없는, 그래서 더욱 친숙하게 느껴졌던 ‘책 잘 읽고, 글 잘 쓰는 언니/누나’였습니다.      



이 책을 우연히 만날 수 있었던 이유


옥상에 앉아




< 우연히 만난 책들 >


책방 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책방을 방문할 때마다 공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책을 한 권씩 구매합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책들을 그냥 묵혀 두기 아까워 책에 대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 우연히 만난 책들 >은 그렇게 탄생하게 된 글 모음집입니다.

글에서는 책방에서 책을 고른 이유와 책에 대한 소소한 감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달 모나 Monah thed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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