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론>, ‘동방서림’에서 우연히 만난
나는 미국 어느 인디언 보호 구역의 학교에 새로 부임한 백인 교사의 일화를 늘 가슴에 품고 산다. 시험을 시작하겠다고 하니 아이들이 홀연 둥그렇게 둘러앉더란다. 시험을 봐야 하니 서로 떨어져 앉으라고 했더니 아이들은 어리둥절해하며 이렇게 말하더란다. “저희들은 어른들에게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함께 상의하라고 배웠는데요.” (p.85)
<숙론 - 어떻게 마주 앉아 대화할 것인가>, 최재천 중 발췌
‘숙론’은 ‘논쟁’보다는 덜 대립적이고, ‘논의’보다는 입체적인 단어로, ‘함께 숙고하며 옳은 것을 토론하자’는 의미의 말이다. 숙론은 저자인 최재천 교수가 재정의한 용어로, 영어 표현으로는 discourse로 번역된다. 용어를 재정의하며 적당한 영어 번역어를 붙이는 것, 전형적인 ‘교수님’의 면모가 아닐 수 없다. 교수님들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기존의 단어들을 재정의하고, 적절한 영어 번역어를 고심해 붙이기를 즐겨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연구 습관이 생활화된 탓일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의 연구자들을 위한 변을 간단히 덧붙이자면,) 교수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아무 때나, 멋대로 새 용어를 창작하는 건 아니다. 연구하는 이들이 이렇게 ‘새로운 용어’를 제안하는 경우는 대체적으로 다음 두 가지에 해당한다. 1) 기존에 없던 새로운 개념을 주창하고 싶어서, 2) 모두가 알고 있지만, 정확히 언어화할 수 없었던 어떤 사항이나 쟁점을 명시화하기 위해서이다. 1)과 2) 사이에는 회색 지대가 존재하지만, 둘의 다른 점은 1)은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발표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고, 2)는 암묵적으로 합의되어 왔던 어떤 개념을 언어로 구체화해 논의하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다. 둘 중 최재천 교수의 ‘숙론(discourse)’은 후자에 가까우며, 이는 곧 저자가 통상적으로 만연한 어떤 쟁점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해결책을 모색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최재천 교수가 논하고 싶었던 ‘쟁점’은 무엇일까. ‘숙론’이라는 단어의 의미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교수의 핵심 쟁점은 ‘분쟁으로 치닫는 현 사회’다. 이념, 지역, 계층, 빈부, 남녀, 세대, 환경, 다문화 등, 현재 우리 사회는 이보다 더 쪼개질 수 없다고 느낄 정도로 갈라지고 찢어져 다투고 있다. 저자는 ‘갈등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보다 세상에 드러나고 있는’ 것이 사회가 ‘선진화되는 과정의 방증’이라며 자못 너그럽게 해석하면서도(p.33), 수만 가지 갈등들이 해결해야 나가야 할 과제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그래서 저자는 현 상태를 타개할 방법으로 ‘숙론’을 제안한다. 기존에 통용되었던 ‘토론, 토의, 논쟁, 논의’보다는 더 나은 형태의 합의 방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절실히 느끼는 지금, ‘숙론’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통해 갈등을 조정할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해 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듯 책의 전제가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려는 것인 만큼, <숙론>은 200페이지에 걸쳐 ‘어떻게 하면 숙론을 올바르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장대한 설명에는 앞서 언급한 현시대의 다양한 문제들(이념, 지역, 계층, 남녀 갈등 등등), 몇십 년간 교육자로서 경험한 ‘숙론’ 수업의 사례들, 사회에서의 다양한 ‘숙론’의 경험들, ‘숙론’을 수행하는 이상적인 시나리오 모델들이 차례대로 거론되며, 다양하게 나열된 조각들은 쌓이고 모여 ‘숙론’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완성한다. 그래서 책을 덮을 때쯤,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어지러운 현 세태에 왜 ‘숙론’이 제안되었는지를, 어떠한 태도,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통해 그를 대해야 하는지를. 나아가 창의력과 다양성을 용인하는 사회가 왜 필요한지를, 서로를 받아들이는 마음과 포용적인 사회가 왜 절실히 요구되는지를, 알게 된다.
책의 에필로그에는 <숙론>을 관통하는 한 문장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만 사랑할 수 있다(올더스 헉슬리)’라는 말. 숙론의 방법론을 내내 통설했던, 책의 본문과는 대비되는 이 감성적인 문장은, 앞선 무수한 문장이 전하지 못했던 어떤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비유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를 ‘알게 하는 것’은 문제 있는 반려동물과 문제아(소위 금쪽이)를 다루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우선적으로 거치는 절차다. 진행자들은 문제 동물/아이의 행동을 분초 단위로 끊어 분석하며 그들의 행동학적 이유를 보호자와 부모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 즉, 보호자와 부모에게 그 동물/아이를 ‘알게’하는 것이다. 그렇게 체계적으로 ‘앎’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행동과 말들이 마냥 과격하거나 공격적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문제 행동이 한순간에 교정되는 건 아니지만, 상대를 이해한 후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과 이해하지 못한 채로 문제만 해결하려는 건 결과적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특히나 아이/동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보호자는 문제 해결 과정에서도 건성의 태도를 보이기 마련이다. 즉, 누군가와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상대를 ‘제대로 아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해하지 못한다면 상대를 바꾸려고만 들 뿐, 문제를 근원을 해결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알아야 사랑한다’는 그래서 <숙론>을 관통하는 핵심 문장이다. 서로와 마주 앉아 대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로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너와 나 사이에 약간의 교집합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감정적인 투쟁보다, 우악스러운 편 가르기보다, ‘일단 네 생각은 어떨지’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나와 이러이러한 비슷한 점이 있는 네가 왜 나와 다른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가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내 앞에 앉아 있는 너는 ‘나와 사고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른 타인’이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일 뿐이기에, 그 조금의 간격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기 때문이다.
미국과 영국, 일본에는 생각만큼 사회적 분쟁이 많지 않다고 한다. 그들은 거주지를 포함한 모든 생활이 ‘비슷한 이들끼리’ 쪼개져 있기 때문이다. 부자는 부자끼리, 빈자는 빈자끼리, 귀족은 귀족끼리, 귀족이 아닌 이들은 또 그들끼리 생활 반경을 공유하며, 다른 ‘계급’의 사람과는 평생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비교적 평화롭다. 다른 점이 많은 서로와 매일같이 부딪치며 ‘저들은 도대체 왜 저럴까’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국은 너무 다양한 이들이 한데 얽혀 살다 보니 분쟁이 많다고들 한다. 생활 수준이나 배경 등이 전부 가지각색인 이들이 모여 살다 보니, 굳이 겪지 않아도 될 분쟁까지 긁어 부스럼을 만들게 되었다는 뜻이다. 두 사회는 각자의 장단점이 있다. 전자는 서로를 완전히 고립시키지만 자잘한 소음이 적고, 후자는 서로에게 완전히 노출되지만 매일같이 작은 전쟁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회 중 서로를 조금이나마 더 ‘알게’ 되는 건 어느 사회일까. 누구든 치킨을 좋아하고, 콩국수를 즐겨 먹으며, 똑같이 편의점 음료수와 과자를 까먹는다는 사실을 공유하는 사회가 아닐까. 물론, 가끔 부작용으로 온 국민이 명품에 미치는 광기를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맥주 브랜드를 마시느냐에 따라 다른 집단에 속하게 되는 사회보다, 누구든 같은 과자를 까먹고, 같은 치킨을 시켜 먹는 사회가, 더 건강한 사회라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서로와 여전히 논쟁하는 건, 어떻게든 내가 맞다고 우기며 이겨 먹으려고 드는 건, 적어도 우리가 아직 서로를 ‘하나의 집단’이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너와 나는 다르니 대화도 하지 말자’가 아니라, ‘너랑 나는 비슷해 보이는데 왜 이런 점은 서로 다르지?’라는 무의식적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투쟁하는 건 아닐까. 때론 서로에게 질문하는 방식이 도를 넘어 과격해질 때도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어느 때보다 <숙론>이 절실하다. 여전히 궁금증이 남아있고, 무엇이든 맞부딪쳐 해결해 보려고 하는 열정이 아직 존재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올바른 대화의 방법론이다. 서로와 마주 앉아 제대로 의견을 주고받는 방법을 아는 것,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규칙 대신, 목청을 높이지 않고도 합의점을 도출해내는 방법을 학습하는 것. 아마도 전국민에게 필요한 재교육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 아닐까. ‘누가 옳은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를 찾는 방법론’. 숙론은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