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북덕방’에서 우연히 만난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류를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여행하는 인간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인간은 끝없이 이동해 왔고 그런 본능은 우리 몸에 새겨져 있다. (p.115)
세계는 엄연히 저기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 (p.149)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 발췌
여행하는 인간, 여행할 수밖에 없는 인간, 여행해야 하는 인간, ‘김영하’의 생각을 모아 놓은 수필집이다. 유년 시절부터 부모를 따라 해마다 다른 지역, 다른 학교로 옮겨 다니던 것이 일상이었던 작가는 정착보다 방랑이 체질에 맞는 사람으로 프로그램되어 자라났다고 한다. 여행을 선호하는 성향이 된 것이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그는 지금도 길 위에서 생활 중이다. 서울 모처에 정착하며 살고 있을지라도, 그는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여행이 인생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될 정도로 여행과 밀착하여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행에 대한 김영하 작가의 고찰과 통찰은 넓고도 깊다. <여행의 이유>라는 제목만 보자면 마치 여행담 모음집인 것 같아서, 여행하는 이유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할 것 같지만, 사실 책에서 작가의 사적인 여행기는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대신, 책은 통념적으로 인식되던 ‘여행’의 개념을 확장해 더 광범위한 범주에서 여행의 본질을 논한다.
‘여행할 수 없는 시대의 여행’이라는 소재로 첫 포문을 연 작가는, 첫 해외여행의 기억으로 시작하는 여행에 대한 사념은 곧바로 여행과 비슷한 듯 다른 주제로 넘어간다. 서사 속 주인공의 필연적인 여행(이야기란 기본적으로 여정을 바탕으로 하는 법이다,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이야기의 여행 속에 드러나는 인물의 프로그램, 인류의 여행(인류의 대륙 간 이동, 문명 발달과 전이, 융합의 과정), 타인의 여행(1인칭이 아닌 3인칭 관찰자로서의 여행), 비(非)여행과 탈(脫)여행(타인의 여행담을 통해 경험하는 간접적인 대리 여행), 방랑객의 여행(길 위에서 생활하는 삶), 우주 여행, 지구라는 행성에서의 여행, 여행길에서 마주하는 사람들, 여행자의 정체성 등. 한 공간과 상태로부터 이동하여 다시 원상태나 장소로 회귀하는 모든 과정을 ‘여행’이라는 범주로 포괄해 그와 관련된 작가만의 철학을 낱낱이 풀어놓는다.
저자가 소설가다 보니, 책에서는 서사에서 다루는 여행의 개념 즉, ‘인물의 여정’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중에서 역시나 빠질 수 없는 건 소설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길가메시 이야기>와 여행기의 고전인 <오디세이아>인데, 두 고전 중 <오디세이아>를 논하는 작가의 관점이 특히 흥미롭다.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섬바디’라는 명예에 사로잡혀 득의양양하던 오디세우스가 바다 위의 긴 여정 끝에 ‘노바디’로 회귀하는 모습은 여행자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다. 어떠한 모습의 ‘섬바디’일지라도 타지의 이국땅에서는 어김없이 ‘노바디’가 되어버리기에, 여행은 의외로 모두에게 타인이 되는 평등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게 전쟁 영웅이자 장수일지라도, 유명인일지라도 말이다. 여행은 이처럼 낯선 환경뿐만 아니라 낯선 관점의 자신을 직관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
이처럼 저자는 남다른 통찰력과 필력을 통해 행위로서의 여행이 아닌, 여행이라는 행위에 내재한 철학을 파고든다. 그리고 철학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범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타인의 생각으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와 궤를 맞추어 나만의 생각을 뻗어나갈 수 있다는 것. 덕분에 <여행의 이유>는 ‘여행’이라는 단어가 갖는 다면적인 위력을 단순히 흡수하는 것에서 나아가 여행 경험을 좀 더 나만의 것으로 내면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여행이란 이런 것이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나에게 여행이란 무엇이지?”라는, 좀 더 고차원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고나 할까.
돌이켜 보면 여행이 내게 남긴 건 하나였다. 사람. 유적지와 공원, 햇살 가득한 날씨와 급작스러웠던 폭우, 남다른 기술력과 생전 처음 보는 풍경 등 환경적인 요인들도 여행의 기억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지만, 여행의 추억에서 가장 먼저 또 가장 오래도록 남아있는 건 아무래도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사람으로 장소를 기억해 온 것이다. 길을 알려주던 현지인, 열 일 제쳐두고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걸어주던 사람, 반갑게 눈인사하던 아침들, 부끄러워 엄마 품에서 눈만 빠끔 내놓은 채 방긋 웃던 아기, 기차 예약석을 빼앗았던 얌체족과 그런 사람에게 ‘그럼 안 된다’며 일침을 놓던 또 다른 승객, 공원에서 한가로운 주말을 보내던 가족, 물총을 서로에게 겨누며 웃던 아이들, 케이블카에 무거운 유모차를 힘겹게 싣던 젊은 부부와 그런 부부를 위해 망설임 없이 자리를 내어 주던 전 세계 각국의 사람들, 분주하게 오가던 웨이터와 무료한 얼굴로 손님을 심드렁하게 맞이하던 기념품 가게 주인의 딸,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춤추고 노래하던 거리의 예술가들. 공간은 언제나 그곳을 채우던 사람들로 기억된다. 사람이 없다면 동물이, 동물이 없다면 곤충과 식물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사물과 무생물만으로 채워지는 기억은 없다. 그런 기억은 쉽사리 추억이 되지 못한다.
그제야 패키지여행에 왜 그토록 거부감이 드는지를 알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패키지여행을 혐오에 가깝게 싫어하는데, 패키지로 여행을 가게 되면 여행지를 제대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지인이 아닌 현지에서 만난 한국인들로 그곳을 채우게 되어서 결국 여행지를 여행지답게 기억할 수 없게 된다. 같은 나라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떼로 몰려다니는 여행에서 남게 되는 건, 버스에서 나누어 먹던 간식들과 함께 나눈 대화들뿐이니까. (종종거리는 급한 걸음으로 뭘 보는지도 모르는 채 한 유적지에서 다른 유적지로 뛰어다니는 일은 덤이고 말이다.) 그런 일상의 연장선 같은 기억 속에서 여행지의 장대하고도 이국적인 풍경은 단지 배경으로만 머물고 만다. 그렇다고 현지에서 만나는 한국인들이 싫다는 건 아니다. 좋은 팀을 만나면 이 또한 인맥 확장의 길이 될 수도 있으니. 하지만 낯선 경험에 나를 내맡기러 여행지까지 가 놓고, 또다시 익숙한 문화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다. (그게 설령 또 다른 기회의 문이 될 지라도 말이다.) 여행은 김영하 작가의 말마따나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니까.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 하러 그 먼 길을 떠나겠는가(p.220)’
국내를 벗어난 여행을 하지 않은지 어언 몇 년이 지났다. 마음만 먹으면 해외로 날아갈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그때마다 무언가 핑계거리가 생겼다. 질병, 전쟁, 경제적 위기, 그리고 앞의 세 가지로 촉발된 다사다난한 치안의 문제 등. 몇 년 사이 세상은 전혀 다른 곳이 된 듯하다. 하지만 이마저도 의심스럽다. 가지 않으니,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니, 국내와 국외에 벽을 만들어 해외에 대한 편견만 쌓이는 중인 건 아닐까. 어디든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인데, 우범지대와 사기꾼 천국으로 색안경을 끼고서 걱정과 근심만 과도하게 축내는 중인 건 아닐까.
아무래도 여행을 떠날 때가 된 것 같다. 이 무섭도록 쌓여 가는 오해를 씻어내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노바디’가 되는 경험을 자처하여 내 안에 쌓였던 아집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스스로에게 확인시켜 줘야지. 여행은 결국 내가 지닌 파랑새가 파랗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떠나는 것이니까. 분홍색, 하얀색, 초록색, 노란색 새들 틈에서 나의 파란색이 어떠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를 확인하러 가는 것이니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다른 관점을 입혀 재인식하게 되는 것이 곧 여행이니까.
아무래도 여행을 떠나긴 해야겠다. 더 늦기 전에 가야지. 이제는 정말 갈 거다. 정말로. 진짜로 출발할 거다. 정말로 떠날 거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