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장화>, ‘사적인 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집이 스스로 불을 지르기라도 한 것 같았다. 낡고 오래된 집이 극도로 지치고 우울해서 자살을 시도하기라도 한 것처럼. (p.18)
내 정원은 외로운 이 돌 하나로 시작하는 거예요 (p.156)
우리에게 남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무릎을 다치거나 균형을 잃지 않고는 더 이상 자기 보트에 가볍게 뛰어내릴 수 없는 다른 늙은 남자와 같은 벤치에 앉아 있는 것. 우리는 이렇게 고요 속에서 함께 웅크리고 앉아서 죽을 때가 되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모른다며 한탄하고 있다. (p.474-475)
아기들은 자기 자신 외에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다. 신생아들은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하게 될 미완성 스케치이다. (p.493)
- 헤닝 만켈, <스웨덴 장화> 중 발췌
세상의 뒷면을 보게 되는 시기가 있습니다. 손가락 튕김 하나로 동전의 앞뒷면이 바뀌는 것처럼, 세상의 양면성은 늘 우리 눈앞에 존재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눈이 앞쪽에 몰려 있어서 좀처럼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하는 습성이 있다는 거죠.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대체로 앞면만을 보고 살아갑니다. 길을 걸을 때도, 물건을 살 때도, 잡담을 나눌 때도 우리의 시야는 전방의 수평선을 잘 넘어서지 않죠. 그런 생물학적인 본능의 영향일까요. 우리는 사물을 볼 때도 수평선 너머를 잘 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보이는 대로 볼 뿐이죠. 단면적인 눈앞의 세상을 전부라 여기면서요.
이렇듯 제법 단순하게 삶을 영위하는 우리들이지만, 그럼에도 세상의 뒷면은 가끔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구체적인 이유는 상황과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확률상 몇 가지 공통되는 감정이 원인이 될 때가 많죠. 호기심과 두려움. 관련성이 그리 깊지 않아 보이는 두 감정은 긴장감과 생존 본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일말의 유사점을 갖습니다. 무언가를 찾거나 혹은 확인하면서 현 상태의 해답을 찾고자 한다는 점에서요. 따라서 호기심과 두려움은 우리를 보게 합니다. 평소에는 깊이 신경 쓰지 않았던 주변의 풍경을 샅샅이 살피고, 기존에는 포착하지 못했던 세상의 뒷면을 포착하게 하죠. 늘 눈앞에 존재했음에도 미처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세상의 뒷면을 말이죠.
‘죽음이 임박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호기심과 두려움이 동시에 발동하기 아주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줍니다. 죽음으로 향하는 고독한 길에는 정답도, 동행도 없으니까요.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동료가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에는 수만 갈래로 흩어질 뿐입니다. 마침내 맞이하게 될 죽음 앞에선 모든 이들이 혼자가 되니까요. <스웨덴 장화>의 주인공 프레드리크 벨린은 의료 사고를 겪은 후 의료계를 떠난 전직 외과 의사입니다. 하지만 의사라는 직업은 한철의 배경지식이자 특장점으로 남았을 뿐, 그는 현재 심장약을 비상약으로 품고 다니는 칠십 대 노인에 불과합니다. 죽음은 내일 당장 떠나야 할 만큼 임박한 건 아니지만, 이제 더 이상 그 존재를 무시할 수 있을 만큼 희미하지도 않죠. 중년에서 노년으로 완전히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나이, 일흔. 그의 안에는 늘 호기심과 두려움이 내재해 있었습니다. 말로 꺼내지 못했던 감정은 두 갈래로 향하고 있었죠. 하나는 죽음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것, 즉, 노년기의 삶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수면 아래 내재해 있던 이런 궁금증과 혼란은 거대한 불길로 인해 본격적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합니다. 전소되어 버린 집터, ‘무의 바다’ 한가운데서 그는 세상의 뒷면을 볼 기회를 얻습니다. 시작은 딸이었습니다. 사십 년 만에 재회한 과거의 연인 하리에트를 통해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되었던 딸 루이제. 장성한 후에 만난 터라 그녀는 지난 몇 년간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던, 혈연으로 연결된 지인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화재는 그녀를 프레드리크의 작은 섬까지 불러들였고, 다도해에서 단둘이 함께 보낸 시간 동안 그는 처음으로 딸의 윤곽을 어렴풋이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후일 딸의 다급한 전화로 파리로 향하게 되면서 진정한 딸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죠. 소매치기와 사회 운동가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딸. 프랑스어가 서툰 외국인(그것도 유색인)과 스스럼없이 사랑하고, 전쟁으로 상처 입은 그의 동생을 포용하면서도 규정에 어긋난다며 샤워실 열쇠를 내주지 않는 가게 주인에게는 인내심이 쉽게 바닥나버리는 그녀. 셔츠 하나도 국산과 중국산을 구분하고, 다도해 공동체의 명예시민으로 살아가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그렇기에 그녀는 그를 난생처음 다른 관점으로 인도합니다. 칠십 년 평생 공동체와 이방인을 구분하는 것이 당연했던 그에게, 원산지를 확인하는 게 습관이었던 그에게 ‘이방인’의 지위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하죠. 그는 처음으로 잘못과 의심의 근원을 아무런 근거 없이 이방인에게 두는 것이 맞을지를 짚게 됩니다. 이방인의 사회적 위치를 처음으로 자각하며, 그는 비로소 딸과 그녀의 뱃속 아기의 보호자로 발돋움합니다.
다음은 화재 현장을 취재하러 온 기자 리사 모딘입니다. 그녀는 프레드리크에게 그의 나이가 지니는 의미를 일깨우는 존재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프레드리크가 리사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죠. 그보다 몇십 년 어린, 그녀의 딸과 엇비슷한 나이의 리사 모딘에게 전한 구애는 중년이었던 시절과는 사뭇 다른 형태로 되돌아옵니다. 매몰찬 거절은 아니었지만, 노년의 사랑은 일말의 젊음이라도 잔존해 있던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됩니다. 일방향의 기다림, 주고받는 몇몇의 말들, 가만히 누워있는 시간들. 하지만 그는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젊은 날에도 하지 않았던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짓 따위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압니다. 사랑의 열기는 그대로지만, 세월은 온기를 마음을 전하는 방식을 누그러트렸습니다. 그는 점차 알게 됩니다. 그녀에게는 바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지금은 곁에 있지만, 언젠가 그녀는 훌쩍 떠나 버릴지도 모릅니다. 외로움을 나눌 또 다른 상대나 마음이 동하는 새로운 삶의 터전이 등장한다면 말이죠. 이별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일지도 모릅니다. 노년에 직면한 사랑의 뒷면은 제법 가혹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노년이 고독한 이유일 테죠.
마지막은 노년의 최종 목적지, 죽음과 그에 다다르는 모든 이들입니다. 사실 프레드리크는 죽음과 동떨어지지 않은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외과 의사인 그의 곁에는 늘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래서 죽음은 한편으론 익숙했죠. 하지만 노환과 병환으로 하나둘씩 사라지는 마을 사람들과 병실 환자들의 죽음은 확실히 다른 형태로 다가왔습니다. 결승선을 먼저 통과한 사람들의 뒤꽁무니를 좇는 느낌이었죠. 언젠가는 도달해야만 하는 그 마라톤의 결승선 말이죠. 노르딘과 오슬로브스키, 얀손을 비롯한 섬과 내륙의 주민들을 틈날 때마다 확인했던 건, 그들의 죽음이 더 이상 타인의 일로 느껴지지 않아서일 겁니다. 두려움에 번득이는 그들의 눈빛을 확인하고 안위를 걱정하는 건, 아마 그들의 눈 속에서 여태 알지 못했던 죽음에 대한 일말의 단서를 찾기 위함일지도 모릅니다. 죽은 이들의 집 열쇠를 손에 넣어 구태여 남몰래 들어가 본 것도 아마 같은 이유에서일 테죠. 노년의 뒷면. 노년이 쉬이 말해주지 않는 최종의 비밀 ‘죽음’. 도처에 존재하지만, 샅샅이 뒤져봐도 좀처럼 알 수 없는 그 수수께끼의 해답을 알기 위해서 그는 그토록 이웃을 궁금해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자식의 뒷면, 사랑의 뒷면, 세상에 숨겨진 뒷면의 마지막에는 언제나 같은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신선한 깨우침. 눈앞에 숨겨져 있던 뒷면에는 일흔의 노인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죽음. 두려움과 호기심의 최종 종착지였던 그 대상은 이상하게도 자신의 뒷면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마을 사람들을 좇으며 답을 구했건만,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죽음이 감추고 있는 본질을 파악할 수가 없었습니다. 화려한 화염도, 무너져 버린 잿더미도, 계속해서 일어나는 방화 사건들도 그에게는 아무런 단서를 주지 못했죠. 죽음은 그렇게 멎어버린 사건이 되어버린 듯했습니다. 평생 풀지 못할 미지의 사건. 하지만 해답은 의외로 가까이 있었습니다.
죽음의 뒷면에 이르는 과정 중에는 소설의 반전이 있으므로 굳이 세세한 부분까지 상술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프레드리크는 죽음의 뒷면에 있던 실체를 직면한 뒤 한결 편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 죽음의 뒷면이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죽게 될 것인가, 죽을 때 고통스러운가’ 등의 질문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마침내 마주한 죽음의 뒷면에는 임사 체험이나 사후 경험 같은 기이한 현상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더 일상적인. 지극히 현실적인 한 감정이 있었죠. 그 감정의 이름은 지극히 익숙하고 평범한 ‘공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눈앞에 늘 존재하지만 최대한 느끼지 않으려고 밀어내려는 그것. 인지하고는 있지만 지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것. 죽음이 숨기고 있던 뒷면에는 공황에 가까운 발작을 일으키는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프레드리크는 타인의 몸부림을 보며, 죽음과 함께 엄습하는 극심한 공포가 한 사람을 어디까지 내모는지를 두 눈으로 확인하며, 마침내 죽음과 노년의 뒷면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무엇에 대비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죠. 노년기에 필요한 건 죽음으로부터의 도피나 저항이 아닌, 죽음이 몰고 오는 공포를 다스릴 줄 아는 지혜였습니다. 죽음은 언젠가 도래할 테지만, 그때까지의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으니까요.
그렇게 마지막 깨달음과 죽음을 직면한 후, 그에게 더없이 기쁜 소식이 도착합니다. 주문했던 스웨덴 장화가 드디어 도착했다는 전화가 걸려 온 것이죠. 소설의 첫 장, 집이 불탄 직후 주문하고서 여태 받지 못했던 장화였습니다. 그는 전화를 받고서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집을 나섭니다.
새 신은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준다고들 하죠. 새로이 도착한 스웨덴 장화는 프레드리크를 분명 새로운 경로로 인도할 겁니다. 그곳이 어디든, 이제는 그가 한결 편해졌으면 합니다. 뒷면의 반대편에는 언제나 앞면이 있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어디에나 그 둘이 공존하니까요. 뒷면의 깨달음을 얻은 그가 이제는 앞면에서 안식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사적인 서점
< 우연히 만난 책들 >
책방 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책방을 방문할 때마다 공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책을 한 권씩 구매합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책들을 그냥 묵혀 두기 아까워 책에 대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 우연히 만난 책들 >은 그렇게 탄생하게 된 글 모음집입니다.
글에서는 책방에서 책을 고른 이유와 책에 대한 소소한 감상을 담고 있습니다.
링크트리 : https://linktr.ee/monah_thedal
모나 유튜브 : https://www.youtube.com/@monah_thedal
모나 인스타 : https://www.instagram.com/monah_thedal/
모나 브런치 : https://brunch.co.kr/@monah-thedal#works
모나 블로그 : https://blog.naver.com/monah_thed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