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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 골퍼 Jul 30. 2024

45년 지기와 미 서부에서 녹색마약에 빠지다

45년 지기와 미 서부에서 녹색마약에 빠지다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요동 벌판을 보고 호곡장(好哭場)이라 썼다. 크게 한바탕 울 만한 곳이란 뜻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네바다주와 애리조나주에 걸친 광대한 사막을 지나면서 갑자기 울컥했다. 가슴 탁 트이는 일망무제의 대장관. 아득히 멀고 넓어 끝이 보이지 않는 대자연의 장엄함 때문이었다.. 수천리가 넘는 직선도로를 달려도 인가는 보이지 않고 황량하고 넓은 사막만 펼쳐진다. 연암이 만약 이곳에 있었다면 한바탕 크게 울며 희로애락을 토해 내지 않았을까?





■ 미 서부 2,000킬로 장정

   L.A에서 다섯 시간을 달려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다. 사막 위에 건설된 불야성의 도시는 온갖 기묘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욕망과 환락을 부추기고 있다. 블랙잭의 유혹을 애써 뿌리치고 다음날 후버댐과 그랜드캐니언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콜로라도강을 막아 건설한 거대한 후버댐은 다음 목적지인 그랜드캐니언 앞에서 빛을 잃었다. 인간은 도시를 건설했고, 신은 대자연을 창조하셨다는 말을 실감한다. 도박과 환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넘쳐나지만, 웅장한 그랜드캐니언과 세도나의 붉은 암석 군 앞에서는 신의 위대함과 경외감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 세도나 골프

   우주의 기가 몰려 있다는 세도나에 위치한 오크클릭 CC에서 첫 라운드를 가졌다. 골프 코스 주위를 둘러싼 붉은 암석산이 초록 잔디와 대비되어 더 강렬히 빛난다. 파란 하늘을 가르는 하얀 골프볼과 함께 마치 색채의 향연을 벌이는 듯하다. 사막 기후라 습하지 않고 하늘은 맑고 높다. 골프 스윙 한 타 한 타에 번잡한 마음을 씻어 내린다.



■ 스콧데일 골프


   세도나에서 두 시간을 더 이동하면 애리조나의 주도 피닉스와 스캇데일이 있다. 이곳 PGA 사막코스 두 곳에서 연이틀 라운드 했다. 사막의 상징인 선인장들이 홀마다 도열해 있어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그레이호크 Grayhawk CC는 화려하다. 클럽하우스는 웅장하고 코스조경과 관리상태도 빼어나다. TPC 챔피언 코스는 피닉스 오픈이 열리는 PGA 코스다. 두 곳 모두 훌륭하고 어렵지만 재미있었다. 사막코스는 처음이라 풍광에 넋을 잃고 사진을 찍느라 코스를 온전하게 즐기지 못한 게 아쉬웠다.





■ 팜스프링스 PGA웨스트


   아쉬움은 캘리포니아로 이동 후 다른 골프장에서 달래고도 남았다. 팜 스프링스 지역에 있는 PGA 웨스트 단지 내에는 여섯 개 코스가 있었다. 소유주가 한국인이란 사실이 놀랍다. 모든 코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72홀 라운드로 마무리했다. 


전 세계 골프장은 약 38,000여 개가 있다이중 미국에만 16,000여 곳 이상이 있다미 서부 지역 골프장 몇 곳을 돌아보고 미국골프를 이야기하는 건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다그래도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미 서부는 골프장 건설과 운영에 축복받은 땅이자 골퍼들의 천국이란 점이다.






■ Not Where, but with Whom


   골프천국에서 보낸 9일이 마치 꿈같다. "열한 시간을 날아가 볼 곳도 많은 곳에서 수천리를 이동하며 고작 골프나 치고 왔느냐?"는 아이들 나무라는 소리도 들었다. 골프의 매력과 진면목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GOLF는 ‘Green+Oxygen+Light+Friendship’의 약자이다. 골프는 ‘초록 잔디 위에서 맑은 공기와 양광을 즐기며 우정을 다지는 운동’이란 뜻이다. 호사가들의 풀이이기는 하지만 골프의 핵심을 잘 짚은 멋진 정의이다. 한때 그랜드캐년과 요세미티,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을 버킷리스트 상위에 꼽았던 적이 있었다. PGA투어가 열리는 미서부 골프장들 앞에서 그 꿈은 희미해졌다. 여행일정을 세우면서 제일 먼저 고려한 것이 골프 라운드였으니 함께 했던 네 명 모두 녹색마약에 단단히 중독된 상태였던 모양이다. 



마주 보기보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편하고 좋다. 생각도 비슷하면 좋고 취미와 좋아하는 일이 같으면 금상첨화다. 그래서 여행은 누구와 함께 하는지가 목적지 이상으로 중요하다. 이번 여행은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하고 감사했다. 아내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한 여행이기도 했고,, 모든 일정을 준비하고 9일간 함께 여행한 미국의 친구내외가 있어 더 멋진 시간이 되었다. 



■ 서리 맞은 단풍 꽃 보다 아름다워라


   미 서부 일대 2,000여 킬로미터를 직접 운전해 우리를 안내했다. 함께 라운드 하고 심지어 여행비용 일체를 부담하기까지 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피해는 모래에 쓰고 고마움은 대리석에 새기란 속담을 생각한다. 미국으로 건너온 후 긴 고생 끝에 제법 자리를 잡았다 해도 쉬운 일은 아니다. 반미를 외치던 젊은 날의 우리 모습은 백발 뒤로 숨었고, 이제  미국땅에서 아메리칸드림을 이야기하며 씁쓸히 웃었다. 꽃다운 젊음은 갔지만 서리 맞은 단풍이 봄날 꽃 보다 아름답다고 자위하며 또 한바탕 웃었다.. 오랜 시간 밀린 정담을 나누기엔 열흘 가까운 시간도 짧았다. LA공항에 들어서면서 톰 브래들리( Tom Bradley) 공항이란 큰 글씨가 흐릿하게 보인다. 연암의 호곡장에서는 한바탕 울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눈시울을 붉히며 귀국행 비행기 트랩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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