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초롱 Dec 09. 2020

프리랜서를 위한 연수원이 있다면

우리 직업은 미래형이라서요

내가 속한 부서의 부장님은 회사에 출근할 때부터 퇴근할 때까지 미간에 잡힌 주름을 거의 펴는 일이 없는 분이었다. 회의 때면 각 분야 담당자들이 그날의 할 일에 대해 브리핑을 했는데, 부장님이 직원들을 얼마나 눈물이 쭉 빠지게 혼내는지 나도 식은땀이 났다. 그런 부장님이 유독 내게만은 화를 내지 않고 일을 가르쳐주셨다. 요즘 사람들이 질색하는 ‘가족 같은 기업’ 분위기 덕에, 나 같은 신입사원을 가족의 막내 정도로 취급해서일까? 종일 부여잡고 있던 보고서를 들고 부장님을 찾아가면 그는 보고서에 삼십 센티 플라스틱 자를 대고 한 문장 한 문장을 더듬어 내려갔다. 


“이 단어는 회사에서 쓰기에는 좀 그렇지? 다른 선배들 보고서 보고 어떤 단어를 주로 쓰는지 살펴봐.”

“넘버링은 세 개로 끊는 게 좋아. 눈에 딱 들어오게.”

“표 눈금은 100개 단위로 다시 조정하고, 이런 그래프는 원형으로 만들고.”


빨간 줄이 박박 그어진 보고서를 들고 자리로 돌아오는 일은 침울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해서 나를 가르치는 일이 그에게는 또 얼마나 피곤했으랴 싶다. 일을 못 하면 못하는 대로 그저 내치는 사람이었다면 부러 바쁜 시간을 내어 빨간 줄을 긋지도 않았겠지. 후에 나는  ‘네가 못하는 건 네 탓, 나는 아무 잘못 없어요’라는 무책임한 리더와, ‘기회는 세 번이다. 안 되면 넌 실격’이라 말하는 가혹한 리더도 만났다. 한 회사에 있었던 시간이 6년. 그 시간 동안 그래도 퍽 많이 배웠다.

클라이언트는 일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기회는 한 번뿐! 


프리랜서가 되고 나서는 아무도 내게 일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물론 자신의 일의 퀄리티는 자신이 높이는 것이지만 어떤 일이든 기본적으로 ‘일머리’라고 불리는 스킬이 있다. 메일을 쓰는 법, 커뮤니케이션 하는 법, 업무 범위를 파악하고 그 안에서 나의 역할을 정하는 법, 효율적으로 일을 하기 위해 절차를 간소화하는 법 등이 모두 ‘일머리’에 포함된다. 그러나 프리랜서의 작업물의 전문성과 별개인 이 일머리는 조직 밖에서 배우기 참 어렵다. 


아무도 프리랜서에게 보고서에 담긴 표의 눈금 간격이 적절하지 않다며 나무라지도, 이런 걸 참고해보라며 자료를 던져주지도 않는다. 해병대 훈련을 하지 않는 건 고맙긴 한데, 그 영역의 선배가 와서 조는 나를 나무라며 머릿속에 무어라도 구겨 넣으려고 노력해주지도 않는다. 클라이언트가 업무의 내용과 영역이나마 명확하게 해주면 감지덕지다. 일을 못 하면 어떻게 하냐고? 어떻게 하긴. 그냥 잘리는 거지. 


 클라이언트는 굳이 프리랜서를 가르쳐 일을 시킬 필요도, 일 못 하는 프리랜서에게 따끔하게 충고를 줄 필요도 없다. 물론 프리랜서도 그런 클라이언트를 바라지 않는다. 회사가 바라는 방향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다른 프리랜서를 찾으면 그만이니까. 직원을 해고하는 데는 참 많은 절차가 필요하지만, 프리랜서와 다시 일을 하지 않는 데는 아무 절차가 필요 없다. 그저 프로젝트가 끝난 후 다시 연락을 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멋진 말로 장식하자면 프로의 세계, 가족 같은 질척거림으로 서운함을 표현하자면 차가운 세계다. 


 그래서일까? 프리랜서로 일하는 동안 나는 회사에 있을 때보다 일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걸 배웠다. 회사라는 큰 시스템에서 나는 작은 일을 꼼꼼하게 맡으면 되었지만, 프리랜서의 세계에서는 각종 부서에서 해야 할 일을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인사팀이자 재무팀이고, 영업팀이자 마케팅팀이며, 신기술 개발팀이자 법인팀이다. 내가 나의 비서고 사무보조다. 

아무도 내게 삼십 센티 자를 들이밀지 않는 세계에서 


프리랜서가 되고 나서 잘하게 된 점 중 하나는 커뮤니케이션이다. 프로젝트 전체의 목적과 방향성을 파악하고 그 일을 함께 하는 구성원의 역할과 내 역할을 짚는 일을 잘 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글과 그림을 이용해 세계 평화를 표현하는 전시를 하는 데 글작가로 참여했다고 한다면, 세계평화라는 주제를 왜 잡게 되었는지, 이 전시를 기획하는 주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파악한다. 전시회에 사람이 많이 오는 게 목표인지 보고서에 그럴 듯하게 들어가는 사진이 필요한 건지, 아니면 내년에 본격적으로 진행될 프로젝트를 위해 시범적으로 돌려보는 프로젝트인지 알면 일을 하는 게 더 수월하다. 그림 작가와 합을 맞출 때도 그림 먼저 그리고 글을 덧붙일 것인지, 내가 먼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게 맞을지 사전에 충분히 논의한 후에 진행하게 된다. 프리랜서가 되고 나서 이렇게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된 건, 커뮤니케이션을 잘 해야 내 일이 빨리 끝나기 때문이었다. 앉아 있는 시간 만큼 돈을 받는 게 아니었기에 어떻게든 일을 효율적으로 빨리 끝내야 했고, 자연스럽게 어떻게 일을 잘하게 될까 골몰하게 되었다. 


두 번째로, 프리랜서가 되고 나서 나는 각종 툴에 익숙해졌다. 회사에 있을 때는 한글과 워드, 엑셀과 파워포인트만 잘해도 되었는데 이젠 영상편집, 음원편집, 포토샵도 배워야 한다. 프리미어와 빌로(영상편집어플), 캔바(포스터편집어플)와 스퀘어 에딧(사진편집어플)을 쓴다. 클라이언트가 쓰는 온갖 생산성 툴을 나도 같이 써야 하기에 노션과 트렐로, 워크챗과 구글 드라이브를 익힌다. 나와 함께 딴짓 매거진을 만드는 디자이너는 프리랜서가 되고 나서야 유튜브 강의로 인디자인(출판디자인 프로그램)을 배웠다. 프리랜서에게 꾸준한 일감이란 곧 밥줄. 일을 잘하냐 못하느냐는 부장님께 혼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세계를 넘어서 내일 돼지고기를 먹을 거냐 소고기를 먹을 거냐의 세계로 바뀌었다. 나는 알아서 메일에 빠릿빠릿하게 답을 하고, 알아서 마감 기한을 지킨다. 


세 번째로 무엇보다 치열하게 배웠던 건 역시 영업과 마케팅 아닐까? 일을 따내고 나 자신을 홍보하는 일은 아직도 참 어렵다. 큰 기업에 있으면 영업팀에 감사할 일이 별로 없다. 일이란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기에 때로는 많은 일이 버겁고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일이 없으면 손가락 빨아야 하는 프리랜서에게는 무엇보다 영업팀이 간절하다. 작은 회사에 있을 때 영업을 잘하던 대표가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일을 계속 따오고, 일만 하면 되니 얼마나 행복해요?”


그 말을 듣고 직원들 대부분은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솔직히 대표의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게 아니다. 일을 따오는 일이 프리랜서에겐 가장 어렵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일감 따오는 일만이라도 프리랜서에게 또 맡기고 싶은 지경이다.


일반 직장인이라면 알지 않아도 될 일들도 배운다. 프리랜서 1년 차가 되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종합소득세 신고를 했다. 회사에 있을 땐 회사가 갖춰준 시스템에 접속해 그저 확인, 확인을 누르면 되었던 간단한 일이었지만, 내가 직접 세무 신고를 하게 되면서 기본적인 세법 공부를 시작했다. 인터넷을 뒤적거리고 같은 프리랜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세무서에 찾아가 담당자를 괴롭혔다. 회사에서 담당자에게 부탁했던 세금계산서 발행과 인건비 지급도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볼펜과 인쇄 용지를 사고, 포스트잇과 스테이플러 심을 사는 일조차 시간을 들여 해야 하는 업무라는 걸 알았다.


 아무도 내게 삼십 센티 자를 들이밀지 않는 세계에서 나는 생명력이 질긴 노동자가 되었다. 회사에 있을 때도 참 다양한 상사를 다 만난다 싶었지만, 그보다 더 특이한 클라이언트를 만나다 보니 별의별 상황에 익숙해진달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일단 나를 고용하고 보는 클라이언트, 업무 진척 속도를 엑셀 시트로 주었더니 엑셀을 할 줄 모른다고 한글로 달라고 했던 고용주, 통장사본을 보냈더니 기타 소득세를 떼지 않고 현금으로 쭉 밀어 넣었던 회사, 프리랜서도 직원이니 꼭 회식을 같이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부장까지. 누군가 나를 위해 다양한 워킹 상황을 준비해둔 것 같다. 당신이 어떤 클라이언트를 좋아할지 몰라서 전부 다 준비해봤어요! 감동의 눈물이 흐를 것 같다.


프리랜서 꿈나무에게, 일단 회사를 권해 봅니다


그럼 어디서 일을 배워야 할까? 엉뚱하지만 나는 회사에서 일단 배우고 프리랜서의 세계로 오라고 말하고 싶다. 프리랜서라는 게 어느 날 결심한다고 회사 입사처럼 착착 진행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프리랜서로 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얼마간이라도 회사에 다녀보라 권하고 싶다. 아무도 프리랜서에게 일을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메일을 쓰는 방법도, 명함을 건네는 사소한 제스처도, 전자세금계산서를 발행하는 법도 혼자 익혀야만 한다. 그런 일이야 현장에서 몸으로 배울 수 있다고 치더라도, 클라이언트에게는 필요하지 않지만 노동자에게 필요한 일을 간과하기도 쉽다. 건강보험료를 과다하게 청구받지 않기 위해 해촉증명서를 떼야 한다거나, 계약서에서 업무 범위와 기간을 명확하게 명기해야 한다는 이야기, 저작권의 시효가 언제 만료되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이야기는 미리 알기 어렵다. 프리랜서를 대상으로 한 교육은 점차 늘어나고 있지만 관 주도의 강의는 수도권 중심으로 일부만 진행되고 있다. 


 회사를 먼저 다녀보는 게 일하는 데 도움이 되는 또 다른 이유는, 클라이언트의 입장을 이해해야 일의 맥락을 파악하기 쉽기 때문이다. 누군가 새로운 광고에 들어갈 삽화를 요청했다고 해보자. 담당자의 말만 듣고 삽화를 그렸는데 그게 전체 광고 콘셉과 맞지 않을 수 있다. 혹은 담당자는 마음에 들었는데 과장이나 부장이 퇴짜를 놓을 수도 있다. 결제가 어느 선에서 확정되는지, 처음부터 완성품을 주는 게 좋은지 아니면 채색 전 그림을 던져주고 수정을 받은 후에 완성을 하는 게 좋은지, 이 담당자의 권한과 책임은 어디까지인지 안다면 작업이 더 수월하다. 회사에 다니면서 프리랜서를 고용할 일이 있었을 때 나는 내심 그가 점심을 먹고 난 후에 전화를 걸었으면 싶었다. 9시부터 11시까지는 간밤에 온 메일을 확인하거나 회의를 하느라 정신이 없고, 11시부터 12시까지는 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여유가 없고, 12시부터 1시 30분까지는 점심시간 후 한숨 돌리는 중이기 때문이다. 통화는 웬만하면 2시 이후가 좋았다.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나는 회사원에게 웬만하면 오전에 전화를 잘 걸지 않는다.


 메일을 받았으면 받았다고 일단 답하는 것도 내가 일을 맡기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얻은 습관이다. 메일을 보냈는데 받았는지, 확인했는지 소식이 없으면 어쩐지 그 사람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설사 메일 내용에 답할 준비가 되지 않았더라도 일단 ‘확인했다. 생각한 후에 답변 주겠다’ 혹은 ‘회의 후에 답변 주겠다’라는 답이라도 얻으면 그 사람이 나와 함께 사무실에 있는 듯했다.


프리랜서를 위한 연수원이 있다면 


프리랜서는 갑옷 없이 노동 시장에 나온 사람이다. 개인적으로는 회사가 아니라 국가에서 프리랜서를 위한 갑옷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일단 맨몸인 지금 프리랜서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옷을 두껍게 입는 일 혹은 피부를 단단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건 경험과 프리랜서의 연대를 통해 만들 수 있는 일이겠지만, 그 경험을 위해서는 일단 조직 경험을 권하고 싶다. 어쩌면 조직에서의 생활이 은근히 잘 맞아서 프리랜서를 하고 싶은 생각이 쑥 들어갈 수도 있다! 


 노동자 대부분이 프리랜서로 일하게 되는 미래가 오면, 어쩌면 프리랜서를 위한 연수원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프리랜서들에게 다 같은 옷을 입고 새벽 7시에 줄지어 뛰라고 하면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연수원까지는 아니더라도 프리랜서가 개인 노동자로서의 권익을 국가로부터 보호받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런 날이 오기 전까지는 알아서 일을 배우는 수밖에. 내 보고서를 보며 내가 빨간펜을 드는 수밖에.




매거진의 이전글 출근이 없는데 퇴근 시간도 없네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