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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초롱 Dec 16. 2020

여성혐오 사회에서 여성으로 일하기

너 혹시 페미니스트, 뭐 그런 거야?

“너 혹시 페미니스트, 뭐 그런 거야?”


영화제작사와 함께 한 프로젝트가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배우가 그렇게 물었다. 내가 여성과 일에 대한 팟캐스트 ‘큰일은 여자가 해야지’를 운영하고 있다고 말한 후였다. 이름부터 페미니스트 향내가 풀풀 풍기다보니 이런 질문을 곧잘 듣는다. 그럴 때마다 우리말의 미묘한 위앙스에 대해 감탄하게 된다. ‘너 페미니스트니?’와 ‘너 혹시 페미니스트, 뭐 그런 거니?’는 얼마나 다른가! 그는 곧이어 다른 펀치를 날렸다.


“그렇게 안 보였는데.” 

페미니스트, 뭐 그런 거냐고요?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스트’와 그가 생각하는 ‘페미니스트, 뭐 그런 거’에 차이가 있는 걸까? 아니면 그는 모든 성이 평등해야 한다는 상식에 반기를 드는 걸까? 그가 그런 말을 하는 순간 내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한 것처럼, 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내가 페미니스트라 말하는 순간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내가 고민하는 무게 만큼, 그도 그런 질문을 던질 때 어떻게 던져야 하나 고민을 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건 그가 클라이언트고 내가 프리랜서여서가 아니라, 그가 남자이고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권력이란 어쩌면 ‘그런 거’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인지도 모른다. 고민하지 않고 질문할 수 있는 힘일지도 모른다. 힘 있는 자들의 질문은 그래서 ‘실례가 안 된다면’, ‘괜찮으시다면’ 따위의 사족 없이 깔끔하다. 


내가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주변에 있던 남자 작가와 감독이 후다닥 입을 열었다.


“나도 페미니스트인데?”

“저도 페미니스트예요.”


나는 막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감독의 영화를 본 참이었는데, 스릴러물인 그 영화에는 거의 모든 출연진들이 남자였다. 여자는 형제로 나오는 네 명 남자 배우의 늙은 어머니와, 밥상을 차려주는 역할이 전부인 며느리뿐이었다. 평생 아들들 뒷바라지만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회한과 자신들을 잘 돌봐줬던 누이에 대한 추억이 잘 스며든 그 영화를 보며 나는 감독이 과연 이 성비의 기이한 불균형에 대해 생각해봤을까 싶었다. 단역 외에는 여자밖에 나오지 않는 영화를 보면 우리는 분명 어딘가 어색함을 느낄 터인데, 어째서 반대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걸까? 자매 넷이 모여 밥을 차려주었던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늘 자신들 생각뿐이었던 오빠에 대한 추억을 곱씹으며 남편이 차려준 술상을 거나하게 즐기는 영화. 술상을 차려 준 형부에게 술을 따르게 하고, 몇만 원쯤 쥐어주는 그런 영화. 그런 영화를 나는 본 적이 없다. 감독은 정말 페미니스트였나?

욕을 하지 않는다고 혐오가 아닌 것은 아니다


외주로 인터뷰를 하다 보면 종종 이런 말을 듣곤 한다.


“이렇게 말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여자로서 남들보다 차별을 적게 받은 편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나도 그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보다 차별을 덜 ‘느끼고’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말하는 게 조심스러운 이유는 내가 민감하게 느끼지는 못했지만 분명하게 존재했을 차별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다고 해서 차별받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차별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을 ‘예민한 사람’ 취급하는 이유로 쓰이거나, 여타의 사회권력을 가진 사람이면 여성으로서의 차별을 덜 받는다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권력을 가지지 않은 사람으로서 나는 언제나 말하기 전에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조심스럽게 말해보자면,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여성 혐오의 발언 때문에 불편했던 적이 남들보다는 적을 것 같다. 그건 내가 조직 밖에 있어서라기보다는 내가 일하는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책을 만들고 글을 쓰고 사회적경제와 관련된 이들은 비교적(!) 젠더 감수성을 중요한 덕목으로 여긴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자처하는 사람이 많았고, 모든 젠더에 열려 있다고 공언하곤 했다. 


게다가 감수성이 지성인의 새로운 책무가 된 사회에서, 일하는 자리 혹은 공적인 자리에서 본격적인 여성 혐오 발언을 지껄이는 사람은 적어도 내 지인 중에는 많지 않다. 그들도 온라인 어딘가에선 익명의 목소리로 혐오 댓글을 달지 모르지만, 적어도 명함을 내밀며 만나는 자리에서는 가식적인 예의라도 차린다. 그러나 여성 혐오를 욕설과 함께 내뱉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혐오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다.


가끔씩 그들의 입에서 툭 하고 뱉어져 나오는 여성 혐오 단어나 문장은 나를 질겁하게 했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지만 ‘한국 여자는 품에 쏙 들어와서 좋다’든지, ‘여자들은 예민해서 디테일을 잡는 일을 맡겨야 한다’든지, ‘여자가 이런 일(몸 쓰는 일) 하기 힘든데 대단하다’든지. 딴에는 칭찬이라고 하는 말들 속에 숨겨진 그들의 생각을 되짚어보며 나는 어디까지 침묵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리고 예쁜 분과 함께 일하니 일이 더 잘 되는 것 같아요.”

“결혼해서 남편보고 일하라고 해요. 내가 여자라면 그렇게 할 텐데.”


칭찬과 진심이 담긴 조언이라고 해서 그것이 혐오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남미를 여행하는 동안 나는 아시아 여자에게 따라붙는 집요한 캣콜링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만, 아시아 여자를 만만히 보는 시선 때문에 보안 검사를 편안하게 통과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보안검색대에서 깐깐하게 굴지 않는 그들의 자세 밑에는 무엇이 있었나? 검은 머리의 작은 여자를 보는 그들의 시선에는 무엇이 있었나? ‘귀여워서’, ‘보살펴주고 싶으니까’ 따위의 말에는 상대를 자신과 동등한 위치로 보지 않는 무시와 폄하가 깔려 있다. 귀여운 애완동물 취급을 받는다고 기뻐할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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