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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초롱 Dec 21. 2020

프리랜서의 돈 관리

돈은 나의 수호천사

“내가 카드로 300만 원이나 썼다고? 그럴 리가 없어!”


매번 카드 명세서를 받을 때마다 나는 가혹한 지주를 만나 쌀가마니를 통째로 넘겨야만 하는 소작농이 된 기분이 든다. 어째서 내게 이런 일이! 퀴블러로스의 분노 5단계, 그 첫 번째 절차를 밟는다. 내가 비싼 술집에 가기를 했나, 샤넬백을 사기를 했나, 하다못해 병원이라도 다니기를 했나.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사실을 부정하며 명세서를 차근히 짚어보면 이상하게도 그 소소한 지출들은 다 내가 한 게 맞다. 월요일에 아이스카페라테를 4,500원을 주고 사 먹었고, 고로케가 유명한 그 빵집에서 12,000원어치 빵을 산 게 맞고, 홍대 앞에서 씽씽이를 10분 동안 타느라고 1,500원을 쓴 게 맞다.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 뒷면에 꽂힌 카드를 내밀었던 순간들을 되짚어본다. 그래도 인정할 수 없다. 만 원, 이만 원 쓴 건 맞는데 이 돈이 다 모여서 300만 원이 된다고? 12,000원 더하기, 4,500원 더하기, 1,500원. 계산기에 친히 내가 쓴 돈을 다 입력해보면 놀랍게도 300만 원이 나오는 마법이 벌어진다. 짜란!

저는 돈 관리에 소질 없는 프리랜서입니다만


어릴 때부터 나는 참 돈 관리에 소질이 없었다. 부지런히 용돈기입장을 쓰던 언니와 달리 내 용돈기입장은 수학의 정석 책처럼 앞부분만 까맣게 때가 탔다. 지갑에 돈이 있으면 얼른 간식을 사 먹었고 돈이 다 떨어지면 그냥 참았다. 계획 없이 돈을 쓰는 건 대학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다행히 돈 버는 데는 거부감이 없어서 아르바이트를 참 많이도 했다.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번 돈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단 한 번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30년 동안 한 자리에서 장사를 한 상인의 딸로 자란 내가 어쩌다 이렇게 돈에 눈이 어두웠는지. 처음 회사에서 월급을 받았을 때도, 그 돈을 어찌하지 못해 일단 통장에 넣어두었다. 


‘나중에 어떻게 쓸지 생각해야겠다’


나중이 1년이 되고, 2년이 되고, 무려 5년하고 8개월이 되는 동안 나는 별다른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로 그저 월급이 들어오면 쓰고, 남은 돈을 예금에 넣어두었다. 심지어 회사에서 만들라고 한 계좌의 은행도 바꾸지 않았다. 그때 주식만 사두었더라도! 대출 끼고 오피스텔이나마 장만했더라면! 지금 나는 외주 업무를 할 시간에 한 시간의 낮잠을 더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과거의 나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다. 정신 차려! 네가 왜 일을 하는지 생각해봐!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지갑관리 좀 잘 하게 되었느냐고? 인생의 교훈을 얻고 훌륭한 사람으로 변모한 미담이 되면 좋겠지만 삶은 늘 더 지리멸렬하고 가혹하지 않은가. 작정하고 돈 벌기 시작한 지 벌써 십 년, 회사를 거의 6년이나 다니고 프리랜서 생활을 5년이나 했지만 아직 나는 용돈기입장의 앞부분만 까맣게 채우던 그때에서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나는 여전히 부동산을 잘 모르고, 주식투자의 바이블이라던 <현명한 투자자>를 사두고 앞 장만 읽고 있다. 그나마 그때에 비해 달라진 게 있다면 ‘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과, ‘돈이란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느끼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프리랜서에게는 얼마가 필요한가


프리랜서로 막 발걸음을 내디딘 후에야 나는 비로소 내 지갑 안의 돈을 셈해보았다. 왼쪽, 오른쪽 주머니를 탈탈 털어 얼마가 있는지 세어보았고, 앞으로 내게 얼마나 필요한지 가늠해보았다. 목돈은 얼마나 쥐고 있어야하며, 가용가능 금액은 얼마가 있어야 하는지, 한 달에 필요한 돈은 얼마고, 비상시에 필요한 금액은 또 얼마나 되는지. 돈이란 무엇인가, 돈이 얼마나 필요한가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본 건 솔직히 말해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부끄럽지만 안정적인 월급을 하늘에서 영원히 내리는 만나 정도로 생각했다. 프리랜서에게는 아무도 월급을 주지 않는다. 자리를 믿고 대출을 해주겠다는 조직도 없고, 건강보험이나 연금보험을 내주는 회사도 없다. 


아무도 나의 지갑에 관심이 없으니 나야말로 내 지갑을 더 챙겨야 하건만, 내 주변의 프리랜서들은 회사를 다니는 사람보다 더 돈 관리에 관심이 없다. 부동산이나 주식과 같은 세계에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내가 한 달에 얼마를 쓰고 일 년에 얼마나 자산을 늘리는 지 잘 모르는 프리랜서가 봄날에 흩날리는 민들레꽃씨처럼 많다. 특히 글쓰기나 사진, 음악이나 일러스트 등 창작하는 프리랜서들 중에는 문자 그대로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세계이다 보니 또 기준이 서로가 되어버려서, 돈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지내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돈은 얼마나 든든한 수호천사이며,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해주는 메디치가인가. 프리랜서야말로 그 어떤 노동의 형태보다 더 돈 관리가 필요한 이들이다. 첫째로 급여가 일정하지 않다는 것 자체가 자산을 불안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매일 회사에서 같은 돈이 들어오는 게 확실하다면 적어도 생계비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을 수 있지만, 다음 달에 내 통장에 얼마가 들어올지 알 수 없는 프리랜서에게는 코로나 같은 사태가 터지면 투자비로 생각했던 돈을 생계비로 써야 할 수도 있다. 급여명세서를 받는 게 아니니 자신의 연봉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고, 통장의 숫자가 불규칙하게 오르락내리락하니 자신이 번 돈 중에 얼마를 생활비로 쓸지, 저축이나 투자를 할지 가늠하기 어렵다. 


프리랜서 급여가 불규칙한 이유는 클라이언트의 대금 시기가 일정하지 않은 이유도 있고, 프로젝트가 끝나야만 돈이 들어오는 사례도 많기 때문이다. 1월부터 3월까지 3개월 동안 일했다면 급여는 4월이나 5월이 되어서야 들어온다. 때로는 연말에 예산을 다 털어야 하는 클라이언트의 사정 때문에 11월부터 4월까지 하는 프로젝트의 대금이 프로젝트 중간인 12월에 들어오기도 한다. 업체에 따라 중간 정산을 하는 곳도 있고, 선금을 지급하는 곳도 있지만 아닌 곳도 많다. 어이없지만 돈을 떼먹는 클라이언트가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때로는 내가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고용해야 하는 경우도 생기고, 이럴 때는 내가 일을 맡긴 사람에게 먼저 내 돈을 주었다가 나중에 클라이언트에게 한 번에 받을 때도 있다. 


이렇게 통장 속의 숫자가 오르락내리락하니 내가 정확히 얼마를 벌고 있는지 계산하기 어려운데, 이럴 때 또 다른 부작용은 멘탈 관리가 쉽지 않다는 거다. 선금을 받아 지갑이 두둑할 때는 아직 일할 기간이 많이 남았는데도 괜히 마음이 넉넉해져서 함부로 돈을 쓰기도 하고, 아직 받을 돈은 많지만 하나도 들어오지 않아 근근히 살아야할 때는 프리랜서업 자체에 대한 회의가 몰려온다. 특히 여유자금을 넉넉하게 확보하지 않은 프리랜서는 이럴 때 더 쉽게 흔들린다. 자신과 맞지 않는 일을 급하게 수락해버리기도 하고, 평소보다 낮은 단가가 쓰인 계약서에 허겁지겁 서명을 하게 될 수도 있다. 

나의 세계 속에서 나만의 기준을 잡는다는 것


하여 프리랜서에게 자체적인 돈의 기준을 잡아 보라고 제안하고 싶다. 스스로에게 돈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자신만의 답을 내리도록. 나는 지금 얼마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한 달에 얼마를 써야 만족하는가? 내가 지금 한 달에 쓰고 있는 돈은 얼마인가? 나의 미래를 위해 나는 5년 후 혹은 20년 후에 얼마를 가지고 있기를 원하는가?


물론 얼마를 가지고 있고 얼마를 써야 하고 또 얼마나 벌어야하는지는 개인마다 기준이 다 다를 것 같다. 회사를 그만둔 지 5년, 오랜만에 가깝게 지내던 회사 동기를 만났다. 그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들보다 금방 돈을 모았고 관리도 잘했다. 몇 년 전 결혼해서 막 돌을 넘긴 아이도 낳았고, 그와 아내가 모두 연봉이 7천이 넘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샀던 아파트가 몇억이 오르면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최근 공황장애 때문에 얼마간 휴직을 했단다. 심장이 멎을 것 같은 두려움에 하루에 응급실을 두 번이나 갔던 이야기를 들었다.


“공황장애는 왜 오는 거야?”

“이유가 다 다른데 나 같은 경우에는 불안해서 그랬던 것 같아.”

“뭐가 그렇게 불안했어?”

“삶이 안정적이지 않은 것 같더라고.”

“너처럼 안정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다고! 회사도 안정적이지,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지, 가족 중에 아픈 사람도 없지, 얼마 전엔 아파트값도 올랐다며?”

“그 아파트값은 오른 게 아니야.”

“안 올랐어?”


그의 말에 따르면 그가 4억에 산 아파트는 6억이 되었지만, 그와 같은 부서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부동산으로 그 정도 돈은 벌었기 때문에 사실상 2억 정도는 물가 상승처럼 취급해야 한다고 했다. 이 나라 사람 모두가, 혹은 그가 비슷한 부류라고 생각하는 사람 모두가 똑같은 돈을 벌었다면 그는 실상 한 푼도 벌지 못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의 논리에는 공감할 수 없었지만, 그런 삶을 살고 있는데도 안정적이지 못하다고 느끼는 게 안타깝기도 했다. 그의 세계는 얼마나 빡빡했던 걸까? 돈 관리를 잘하는 건 자신의 안정적인 생활을 준비하는 의미도 있지만 정신건강을 지키기 위한 의미도 있지 않을까? 공황장애에 걸릴 정도로 삶을 불안하게 느낀다면, 타인에게 안정적으로 보이는 자산의 포트폴리오는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세계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지만 그 다양성이 모두 한 곳에 모여있는 것은 아닌지라 우리는 주변을 기준으로 삼아 자신의 세계를 가늠한다. 거의 모두가 핸드폰을 가진 나라에서 살아서 세계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굶어 죽는 사람이 많지 않은 나라에서 살아서 기아는 이미 해결된 것처럼 여긴다. 여자 대부분이 화장을 하는 세계에서 맨 얼굴의 여자가 낯설게 보이고, 장애인의 외부 활동이 자유롭지 않은 나라에 사는지라 실제보다 장애인 비율을 훨씬 낮게 짐작한다. 그의 세계에서 그는 남들보다 대단히 금전적으로 안정적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 사는 30대 청년의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게 안정적이지만.

그를 보며 나는 돈 관리라는 건 남이 모두 해줄 수 있는 분야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하게 돈을 더 잘 벌거나 잘 관리하거나 혹은 잘 불릴 수 있는 방법은 있겠지만(제발 누가 가르쳐주세요), 얼마를 가지고 있어야 하느냐 혹은 얼마를 쓰며 살아야 하느냐 따위의 기준은 제 스스로 잡아야 하는 영역이다. 누군가는 오천만 원만 있어도 든든하다고 느끼는 반면, 누군가에겐 오십 억도 부족할 수 있다. 그게 자신을 둘러싼 세계 때문에 만들어진 기준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논리적으로 따져봐서 내린 결론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 


<2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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