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순천
첫 번째 여행지를 전라남도 순천으로 정한 이유는 지금으로부터 약 4년 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애 시절 남편과 나는 녹차밭을 보고 싶다는 이유로 보성 여행을 계획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숙소까지 예약하고 찾아간 보성에는 어디에도 녹차밭이 없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우리가 찾아간 곳은 보'성'이 아니라 보'령'이었던 것... 무엇에 홀린 것처럼 도착한 보령에서 어이없는 웃음과 함께 조개찜만 먹고 돌아왔던 기억을 되살리며, 그때 가지 못했던 보성을 설이와 함께하는 전국 일주의 첫 여행지로 삼기로 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보성에는 애견 동반 숙소가 거의 없었다. 1박에 몇 십만 원이나 하는 대형 독채 애견 펜션이 있긴 했지만, 주말여행으로 가기에는 호화스러운 곳이었다. 근방의 다른 숙소들을 찾다보니 순천에서 가격과 위치 모두 우리의 짧은 일정에 딱 맞는 애견 동반 게스트하우스를 발견! 그렇게 순천이 우리의 전국일주 첫 여행지가 되었다.
서울에서 순천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4시간. 하지만 주말엔 분명 엄청난 교통체증이 있을 거라 예상하고
'오전 6시 기상, 7시 출발!'을 목표로 했지만... 월~금을 열심히 일한 피로한 맞벌이 부부는 늦잠을 자고 말았다. 결국 계획보다 1시간 정도 늦게 순천으로의 길을 떠났다.
순천에는 멋진 경치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여러 관광지들이 있지만, 사실 강아지와 함께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은 편이다. 애견 동반이 가능한 곳은 낙안읍성 민속마을과 송광사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순천만 국가정원과 드라마 세트장, 고인돌 공원, 낙안읍성 민속마을이 가장 가보고 싶었는데, 이 중 낙안읍성 민속마을이 애견 동반이 가능한 곳이라 무척 다행이었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조선시대 마을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다. 지금도 실제로 주민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찾아간 날에는 하루 종일 비가 와서 관광객이 적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마을이 넓고 잔디 조성이 잘 되어있어서 강아지와 함께 걷기에 좋았다. 너무 좋은 나머지 온몸을 젖은 잔디에 자꾸 비비려고 해서 힘들었지만... 설이는 평소에도 흙 목욕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비 오는 날이나 비가 온 다음 날 땅 위로 나온 지렁이들을 특히나 좋아한다. 이날도 지뢰처럼 지렁이들을 피해 다니느라 애를 먹었다.
이곳에서는 각종 체험도 할 수 있었다. 옛날 초가집 민가에 천연 염색, 전통 혼례 체험 등 다양한 체험장이 운영되고 있었다. 체험장 안에는 소박한 한복을 입고 마루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는 어르신들이 계셨는데, 아마 마을 어르신들이 아르바이트 식으로 관광객들에게 전통 체험을 제공하고 있는 듯했다. 그중에는 유서 쓰기 체험도 보여 '어떤 걸까?'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직접 체험을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서 마음속으로 고민만 하다가 들어가 보지 못했다. 민속마을에서 유서 쓰기라니. 나는 관광지 특유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 다음에 또 오게 된다면 도전해봐야지!
우리의 처음 계획은 마을을 구경한 뒤 미리 찾아둔 애견 동반이 가능한 식당에서 꼬막 정식을 먹는 거였다. 하지만 축축한 흙냄새에 취한 설이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바닥에 대(大) 자로 드러누웠고, 하필 그 아래에는 엄청난 크기의 똥이 있었다... 결국 우리는 화장실에서 설이 옆구리에 묻은 똥을 대충 닦아낸 뒤 주린 배를 붙잡고 곧바로 숙소로 향해야 했다. 아마 이 똥의 주인은 우리처럼 이곳에 여행 온 강아지겠지. 강아지를 데리고 어딘가를 갈 때에는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곳이 집 앞 공원이든,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라면 더더욱. 그래야 앞으로 우리가 강아지와 함께할 수 있는 장소들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저녁은 숙소 주변의 유명하다는 통닭과 떡볶이를 포장해 와 먹었다. 맛도 맛이지만 우리끼리 하는 식사라 마음이 편했다. 설이도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편했는지, 사료 한 그릇을 순식간에 뚝딱 해치웠다. 물론 설이는 언제나 한 그릇 뚝딱이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숙소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바다에 잠시 다녀왔다. 운치 있는 비 오는 밤바다를 상상했지만 현실은 아무도 없고 어두워 조금 무서운 축축한 갯벌이었다.
'바다는 내일 밝을 때 다시 오자!'
다음 날을 기약하며 아쉬운 하루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밤 사이 점점 더 거세지는 빗소리...
결국 계획은 모두 취소. 욕심을 낸다면 집으로 돌아가기 전 한 두 곳은 더 가볼 수 있었겠지만 굳이 욕심을 내지 않았다. 비와 흙으로 잔뜩 젖은 설이를 데리고 서울까지 먼 길을 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행은 원래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는다지만, 강아지와 함께하는 여행은 더욱 그렇다. 여행 전 세워두었던 1박 2일의 일정 중 계획대로 된 게 단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우리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주말에, 설이와 함께, 순천 여행을, 다녀왔으니! 또 여행의 재미는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날 때 더 커지는 것이 아닌가. 설이와 함께하는 다음 여행에는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된다. 하지만 다음번엔 그게 똥은 아니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