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우니까!
소주 한두 병만 걸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나의 단골 주정 레파토리가 있다. “나는 60대가 되면 옥스퍼드에서 미술사 석사를 할 거야. 돈이나 일이랑 아무 상관없이 순수하게 하는 공부인데, 얼마나 재밌겠어.”
집중력을 꽤 오래 요하는 책과 달리, 예술은 찰나의 순간에도 감탄을 만든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머리로 만드는 이해가 아닌, 가슴속 직관으로 만드는 세계. 거대한 예술 덩어리 그 자체인 뉴욕에서 이번에도 부지런히 미술과 음악을 즐기겠노라!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쩐지 한 사람과만 통하는 그 미묘한 '공명'처럼, 음악은 무수한 소음 속에서 꼭 맞는 음만 골라내는 그 '순간들'로 완성된다. 오랜 시간 공들여 여러 차례 고치는 미술과 달리, 순간순간의 연주로 만들어지는 음악의 매력을 직접 느끼고 싶어서, 세 달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드럼. 손가락도 목도 크게 혹사하지 않고, 초보자도 바로 연주할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번 뉴욕에서 작은 타악기(percussions)를 하나 사 보기로 하고, 드럼 전문 매장을 몇 군데 찾아보기 시작했다.
처음 향한 곳은 구글 리뷰 5.0을 자랑하는 브루클린의 Third Floor Bazaar. 한참을 걸어 도착해 보니, 매장이라기보다는 온갖 악기가 산처럼 쌓여있는 창고에 가까웠다. 주인 Jon 아저씨는 싱잉볼부터 HAPI 드럼까지 이것저것 꺼내 보여주며 유쾌하게 설명해 주었다.
‘뉴욕스러운' 퍼커션을 사고 싶어 둘러보는데, 병뚜껑으로 만든 독특한 악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쓰레기인지 작품인지 헷갈리는 그 비주얼은 뉴욕의 쓰레기통 같기도, 예술과 상품의 경계를 허문 앤디 워홀의 작품 <Brillo Boxes> 같기도 했다.
미국 남부 노동자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일상적 재료들로 만들기 시작했다는 병뚜껑 셰이커는, 신기하게도 각각 다른 소리를 냈다. 모두에게 쓰레기 취급을 당하는 병뚜껑이 누군가에게는 악기의 소재가 될 수 있는 사실은 그 자체로, 무수한 진동 속에서 자기에게 맞는 울림만 골라내는 공명처럼 느껴졌다.
두 번째로 간 곳은 미드타운의 Good Hand Drum Shop였다. 문을 여는 순간, "아, 여긴 진짜 고수들이 드나드는 곳이구나" 싶은 공기가 흘렀다. 드럼 초짜인 나는 조심스레 둘러보다가, 손가락 고리가 달린 스틱, 작은 징글(jingle disc)이 달린 스틱 같이 최대한 희한한 중고 스틱 3세트를 샀다.
공연도 보러 갔다. 원래 같으면 재즈를 골랐겠지만, 친구의 취향에 맞춰 이번엔 락 공연을 경험해 보기로 했다. 뉴욕에서 가장 상징적인 락 공연장 중 하나인 Bowery Ballroom에서 보게 된 마이클 산조네(Michael Sanzone)의 공연. 처음 알게 된 마이클 산조네는 스포티파이 팔로워가 70만 명이나 되는 인기쟁이 가수였다. 예상보다 훨씬 어린 팬들이 가득해, 순간 아이돌 공연에 잘못 들어온 건가 싶을 정도.
공연장 한쪽에 마련된 라운지에는 사람들이 신난 얼굴로 한잔 하며 수다를 떨고 서로 기대어 있었다. 친구들과 연인들이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모습은 <가십걸>의 한 장면 같기도 했고, 예전에 영선의 추천으로 갔던 런던 재즈 공연장을 떠올리게도 했다.
음악은 적당히 로맨틱하고 적당히 대중적이었다. 마치 영화 <비긴 어게인> 속 도시의 어둠과 낭만이 동시에 번지는 감성처럼. 재즈 공연 특유의 익숙한 편안함과는 전혀 다른 결이었지만, 그래서 더 신선했다. 역시 함께 하는 사람 덕에 만드는 예상치 못한 경험과 확장되는 세계관은 훨씬 더 특별하게 남는다.
무언가를 오래 남기고 싶은 마음이 들면, 나는 말이나 사진보다는 글로 정리하는 편이다. 지금 쓰고 있는 이 브런치 글처럼. 오랜 시간 겹겹이 쌓아 완성되는 그림의 매력도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여행을 갈 때마다 포스터나 그림을 구경하고 사는 일이 점점 더 즐거워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자칭타칭 ‘포스터 귀신’이라는 별명까지 따라왔다. 뉴욕에서도 브루클린, 뉴저지, 맨해튼 곳곳을 돌아다니며 빈티지 그림을 살폈다. 익숙한 북유럽풍 포스터들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Argosy Bookstore. 1층에는 오래된 서적과 표지, 그림이 가득했고, 직원이 직접 열어줘야 움직이는 작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2층에 오래된 지도와 프린트들이 고요하게 펼쳐져 있었다. 작품 하나하나를 챗GPT에게 찍어 물어보고, 제작 연도와 가치까지 함께 탐색하던 시간이 너무 즐거워서, 마치 옛 화가들과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그날 내가 고른 작품은 1900년대 초중반에 제작된 항해용 나침반 장식도(Compass Rose)였다. 지도책 속 삽화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라틴어와 이탈리아어가 섞인 타이포그래피, 은근히 번지는 금빛 디테일이 마음을 붙잡았다. 장미꽃처럼 보이는 32개의 방향 눈금 때문에, 이런 그림을 ‘Compass Rose’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재미있었다.
가격은 100달러. '한국에서는 약 50만 원 정도의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GPT 감정사님의 말에 기분 좋게 결제했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동네 표구사로 달려가 블랙 프레임을 씌웠다. 매일 정성스레 들여다보는 건 아니지만, 눈에 들어올 때마다 똑똑한 과학자가 된 기분이 든다.
브루클린의 빈티지 숍에서는 또 다른 그림들을 구매했다. 앞유리가 깨져 70% 할인된 상태로 판매되던 페이퍼 컬렉티브의 빨간색 프레임. 한국에서는 10만 원이 훌쩍 넘는 브랜드인데, 단돈 20달러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앞유리는 만 원이면 갈 수 있으니까!
또 하나는, 그림보다도 프레임과 올리브색 매트보드가 먼저 마음에 들어온 미국 포크아트였다. 미국 메인주에 실제 존재하던 작은 잡화점을 그린 작품으로, 메인과 뉴잉글랜드에서 활동한 화가 R. N. Oliver가 남긴 240장 중 134번째 프린트라고 한다. 1900년대 중반 미국 시골 잡화점이 빠르게 사라지던 시절, 많은 지역 화가들이 이런 '사라져 가는 풍경'을 애틋하게 기록해 남겼다고.
뉴욕에서 그림들을 구경하면서 느낀 것이 하나 있다. 작품은 결코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그림만큼이나, 프레임과 공간, 전시 환경과 같이 그림을 둘러싼 모든 요소가 모두 하나의 커다란 예술이라는 사실이다. 이를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던 건,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동아시아 미술 부서에서 일하는 친구 덕분이었다. 기증자 관리 업무를 맡고 있는 친구는 전시장 곳곳을 세심하게 안내해 주고 기증자의 사연, 전시의 배경을 재미있게 설명해 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소장 작품들을 한국관에 기증하고 전시된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한국인 기증자의 얘기도, 큐비즘을 사랑한 에스티 로더의 상속자 레너드 로더(Leonard A. Lauder)의 컬렉션 룸도 재밌었다. 피카소, 브라크 등 이름만 들어도 숨이 막히는 작품들이 이곳에 모이게 된 과정을 듣다 보니, 공간 전체가 어마어마한 집착이 만든 아름다움처럼 느껴졌다. 이것이야말로 천조국의 스케일, 미국식 컬렉팅의 위엄 아닐까.
마지막으로, 많이 알려져 있진 않지만 기억에 남는 갤러리 한 군데를 소개한다. 뉴욕에서 가장 부자 동네라는 Upper East에 있는 Di Donna 갤러리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이곳은 감상을 위한 미술관이 아니라 구매를 위한 매장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관람객 대부분이 ‘작품을 보러 온 사람’이 아니라, ‘작품을 사러 온 사람’ 같았다. 모두가 카탈로그를 손에 들고 천천히 작품을 살피는 모습은, 마치 고급 가구 매장에서 쇼핑하는 고객들 같았다. 백팩을 메고 들어온 사람도, 백팩을 리셉션에 맡긴 사람도 우리뿐이었으니, 얼마나 이곳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관광객 모드’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 전시된 주요 작품은 마그리트였다. GPT에게 물어보니 그 작품들은 대부분 수십억 원대라고 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그림보다도 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더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이 또한 뉴욕이 만들어내는 풍경 중 하나겠지.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의 온기를 품고 사는 바로 그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속 가사처럼, 그저 순수하기만 한 자연의 모습도 눈물겹게 아름답지만 결국 가장 흥미로운 건 역시 '사람'이다. 사람이 만든 이야기, 사람의 마음, 사람의 집착. 이 모든 것이 가득 담겨 있기에, 뉴욕이 흥미로운 것 아닐까. 다음번 뉴욕은 또 어떤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로 가득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