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안의 시민활동가
하나의 상황 예시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당신은 지인과의 만남을 위해 A지역에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당신은 잠시 지인을 기다릴 장소를 떠올리던 중, 예전 역 앞 공터에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을 떠올리고는 그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하지만 너무 오랜만이었을까요? 그 장소에는 이미 커다란 복합 건물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마침 대형프렌차이즈 카페도 입점해 있네요. 당신은 쾌적한 장소에서 커피 한잔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아니면 근처의 다른 유휴 공간을 찾아 새롭게 발걸음을 옮기겠습니까?
꼭 들어맞는 예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상은 우리가 ‘커먼즈’에 대한 문제의식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하나의 예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본격적인 설명에 앞서 ‘커먼즈’에 대한 개념을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단순 단어만을 집중해 살펴보면 ‘커먼즈(commons)’는 ‘커먼(common)’의 복수형이라 할 수 있죠. 커먼이라는 단어는 ‘공동의’, ‘공통의’, ‘일반적인(보통의)’, ‘평범한’ 등의 뜻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커먼 센스(common sense)’, ‘커먼 피플(common people)’이라는 표현으로 유추해 볼 때 이들은 모두 ‘두루두루 통하는 공통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뜻에 덧대어 커먼즈의 번역어를 살펴보면 ‘공유지, 공유재, 공동자원’ 등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많은 이론가들이 굳이 ‘커먼즈’라는 음역으로 이를 호칭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 이유는 해당 말들로는 커먼즈에 담긴 중의적 의미를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비슷한 예로 ‘조율자’, ‘촉진자’의 의미가 함축된 ‘퍼실리테이터’라는 표현을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죠. 혹 또 다른 이유로는 우리 사회 안에서 커먼즈에 대한 공통의 인식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커먼즈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이미지가 바로 어린 시절 동네 곳곳에 보았던 ‘공터’에요. 하지만 이러한 단어와 함께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것 또한 어지럽게 오물이 쌓여 있는 쓰레기 무단 투기 지역의 인상인 것도 사실입니다.
공유지라고 하면 쉽게 떠오르는 논문이 하나 있죠? 맞습니다. 바로 미국의 생물학자 개릿 하딘이 1968년에 발표한 <공유지의 비극>입니다. 잘 알려진 내용이라 부연하지 않겠지만, 요는 바로 ‘공유지는 유지될 수 없다’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목동들 모두 각자의 이익을 위해 공동 목초지에 더 많은 가축을 풀어놓을 것이기에 공유지의 황폐화는 필연적으로 구현될 수밖에 없고, 이러한 비극을 막을 방법은 사유화 혹은 국유화뿐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는 이후 신자유주의나 시장주의의 학문적 정당성을 마련해주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죠. 그렇기에 지금과 같은 현대사회 안에서 공터는 많은 부분 ‘미개발 지역’ 정도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에 반론이 일어난 것은 한참 후라고 해요. 몇몇 커먼즈 학자들은 이상의 공유지의 비극은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1990년, 미국의 정치학자 엘리너 오스트롬은 여러 나라에 존재하는 중소 규모의 커먼즈를 탐방하고 각각의 지역 공동체가 어떻게 자치적으로 공동자원을 관리해 왔는지 추적하였습니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커먼즈는 무질서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경계를 둔 공동체 안의 공동관리 자원인 것입니다. 물론 <공유지의 비극>에 대한 명확한 대안을 단순히 몇몇 사례로 다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커먼즈의 개념은 여전히 우리 사회 안에서 현재진행 형태이기에 더욱 그렇고요. 하지만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 커먼즈를 향한 작은 운동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 안에서도 몇몇 사례들을 꼽을 수 있겠지만, 이번 자리에서는 개인적으로 참여 경험이 있던 ‘경의선공유지’ 사례에 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015년 서울 공덕역의 빼곡한 아파트 사이에는 경의선이 중단되며 철길을 중심으로 넓은 공터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하나둘 예술가, 상인, 문화운동가, 빈민, 연구자 등이 자발적으로 모이기 시작하면서 재미있는 실험들이 함께 이어지기 시작했죠. 그들은 자체적으로 벼룩시장, 문화 공연, 세미나, 독서토론회, 어린이 놀이터, 체육대회 등을 통해 공간, 자원, 지식, 이익, 가치를 함께 만들고 공유하는 커먼즈 실험을 펼쳤던 것입니다. 이후 그들은 그곳을 ‘서울의 26번째 자치구’라고 부르며 해당 공간에 자신들만의 주체 의식을 불어넣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2020년 5월 정부의 강한 압력에 의한 자진 철거를 진행하며 4년여의 실험은 아쉽게도 끝이 났지만, 경의선공유지에서 펼쳐진 실험과 상상력은 무척 유의미했다고 관련 연구자들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 최초의 조직적이고 가시화된 ‘커먼즈’ 운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평소 놓치고 있었던 공간에 대한 ‘사유가 아닌 공유’라는 낯선 질문들을 되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앞선 예로 돌아가 볼까요? 당신은 공원에서 잠시 쉬고자 애써 발걸음을 옮겼지만, 그 앞에서 마주한 것은 대형 프렌차이즈 카페였습니다. 국유지는 헌법상 ‘국가 전체의 이익에 부합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국가 전체의 이익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민자 역사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국유지가 소수의 기업의 사적 이익을 위해 장기적으로 공간이 사용됨을 뜻하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죠. 국유지는 ‘국가 소유의 사유지’가 아닙니다. 국유지가 시민 모두를 유익하게 하는 공익적 기능이 아닌, 정부의 수익 창출과 자본의 축적 활성화에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경의선공유지는 바로 그 지점을 꼬집은 것이고요.
이상의 실패 사례를 바탕으로 살펴보면 커먼즈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과 논의들은 언뜻 무의미한 싸움 같아 보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커먼즈 이론가들과 활동가들이 이와 같이 낯선 싸움을 이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커먼즈의 핵심이 단순한 이론적인 정의보다는 ‘커머닝(commoning)’이라는 활동 혹은 운동성에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커먼즈 이론가들과 활동가들은 삶의 방식을 바꾸기 위한 근본적인 전환의 패러다임으로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커먼즈는 단어적 의미처럼 단순히 공동의 자원 정도로 치환될 수 없습니다. 커먼즈는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관계의 표현입니다. 그렇기에 커먼즈의 언어 자체에는 함께 섞고 나누는 활동, 즉 커머닝이 속해 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중요한 문제는 일상 속 커먼즈의 영역이 사라질수록 우리는 더욱 가난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상황 예시를 한 번 더 돌아보죠. 당신이 카페 공간을 점유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비용을 지출해야만 합니다. 언젠가 저의 동료는 대형 프렌차이즈 카페들은 식음료 사업이 아닌, 초단기 임대 사업을 하는 것이라고 우스개로 말했는데 일정 부분 공감이 가더라고요. 평소 우리는 이러한 가난의 감각을 잘 인식하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지급의 영역을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커먼스의 해체는 우리를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점점 더 가난해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난은 사유의 폭을 좁힙니다. 삶에 찌들어 새로운 기대나 상상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그 가운데 시민 개개인의 역동성은 서서히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커먼스의 영역은 우리 사이에서 경험되지 못한 채로 망각되어 가는 것일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모두 커머닝의 감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사실 자본주의의 역사보다 커먼즈의 역사가 몇 곱절이나 많은 시간을 축적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지금껏 길고 긴 역사를 통해 누군가와 무언가를 함께하고 그를 통해 공통의 관계를 만들어 내고 그 공동체 속에서 거주해 왔으니까요. 다만 그 기억과 감각을 제도 안에서 잠시 잊고 있는 것뿐이라 생각합니다. 서구 사회의 인클로저 운동이나 우리나라로 따지면 일제 강점기의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사적인 형태의 국유화가 사람들 사이에 깊이 침투했던 바로 그 시기처럼 말이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면 동네의 커다란 나무 아래의 그늘 쉼터는 그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었습니다. 굳이 그 주인을 따지자면 그곳은 ‘쉼이 필요한 이들의 것’이었습니다. 거래 중심의 사회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흡사 오래 입은 옷이 제 신체 일부로 착각하며 살고 있다면, 이상의 공통의 감각을 바탕으로 새로운 상상력과 사회 진보에 대한 믿음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즉, 커먼스라는 렌즈를 통해 인간의 가능성을 다시 발견해야만 합니다.
이와 같은 커먼즈의 논의를 시민활동가가 특별히 더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는 시민사회가 시민권력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의 강력한 국가권력과 시장권력 사이에서 온전한 시민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것에 종속되지 않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힘은 어떻게 획득될까요? 네, 맞습니다. 연대적 힘, 즉 공감을 통해 이상이 획득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감하는 이들이 많을수록 시민사회는 더욱 힘이 강해집니다. 그렇기에 시민활동가가 하는 일은 동료 시민들에게 의제를 명시하고 그것에 대한 공감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적 힘을 통해 정부와 시장 사이 힘의 균형을 이루고, 그 구도 속에 마련된 공공의 공간 안에서 모든 시민이 영속적인 자유를 누리게끔 하는 것이죠.
다른 하나는 시민활동가가 긍정적인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일에 업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민활동가는 이러한 사회변화를 위해 정부와 기업, 사회 구조 안에 끊임없이 새로운 상상력을 제안하고, 지속적으로 영감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얼마 전까지 ‘소셜픽션’이라는 키워드가 시민사회 안에 더욱 적극적으로 논의되기도 했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셜픽션이란, 인도의 무함마드 유누스가 2013년도에 한 포럼에서 ‘과학이 공상과학 소설을 닮아가며 세상을 변화시킨 것처럼, 소셜픽션을 써서 사회를 변화시키자’며 주창한 개념입니다. 예를 들면 SF소설과 영화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실제로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강한 동력이 된 것처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통해 이 세상을 보다 건강한 방향으로 함께 이끌어가자는 운동인 것이지요.
사회변화의 역사를 돌이켜 보았을 때 누군가는 시스템 밖의 것을 상상하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태동기가 있죠.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그 아이디어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그것이 다시 구체적으로 사회 안에서 반영되고 확산하는 발전구조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에 몇몇 학자들은 이를 구조적으로 정리해 ‘사회혁신의 발전 프로세스’라고 명명하며 대중들에게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시민활동가는 상상하는 미래를 ‘바로, 지금, 이 자리’의 현실로 끌어들이는 마중물 혹은 선행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커먼즈를 통한 상상력이 지금보다 더욱 시민사회 안에 활발히 논의되고 실험될 때 시민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은 더욱 확장될 것입니다. 물론 그 어떠한 추가적인 비용지불 없이도 말이죠.
[참고 문헌]
<커먼즈란 무엇인가>, 한디디 (2024)
<공유인으로 사고하라>, 데이비드 볼리어 (2015)
<커먼즈의 도전>, 박배균 외 (2021)
<아나키즘>, 하승우 (2008)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 데이비드 그레이버 (2016)
- 이 글은 'SVHUB' 홈페이지에도 게재되었습니다. (https://svhub.co.kr/column/info?id=54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