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선량함을 넘어 각자의 이익을 찾아
현대 사회에서 이익(interest)은 경제활동의 추동 원리로써 무척 중요한 개념이며, 물질 · 비물질적 이익의 창출은 기업이나 가계의 존속에 필요한 기본적인 고려사항이 아닐 수 없죠. 그러나 한국 사회로만 비추어 보면 신유학적 사고가 만연했던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이익’이라는 단어는 오랜 기간 사회 엘리트 계급(양반)에게는 금기어에 가까웠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신유학적 세계관 안에서 이익과 이문을 남기는 행위란 군자의 길(道)이 아닌, 상스럽고 천한 활동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현대의 공리(公利)의 개념은 과거 사회에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유학에서 공(公)은 이익을 추구할 수 없는 것이고, 이익은 오로지 사(私)와 결합되는 것이기 때문이었죠. 이처럼 '멸사봉공'의 인식은 한국 사회의 오랜 전통이었습니다.
신유학적 세계는 근대국가 성립과 함께 막을 내렸지만 이러한 뿌리 깊은 인식은 지속적으로 현대 교육영역에까지 간섭을 해왔던 것 같아요. 더불어 한국 사회 안에서 겪은 식민지 문화, 군사독재 문화까지 공교육 안에 결합하여 사보다는 공을 중시하는 다분히 위계적이고 고압적인 질서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여전히 사적인 주장을 개진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며, 개인의 이기심이라는 것은 공동체성을 흐리는 부덕한 행동으로 인식되고 있는 부분이 솔직히 아직 있죠. 이 가운데 이상화된 좋은 학생, 좋은 시민이란 개인의 이기심을 넘어 공적 영역에 자신을 투사하고 기꺼이 스스로를 희생하는 이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실제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의 공적 준법의식이나 윤리의식은 굉장히 낮은 모습을 보이고 있죠. 예전에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가 연구한 청소년 정직지수 조사결과를 본 적이 있었는데(2013), 초등학생 17%, 중학생 39%, 고등학생 56%가 ‘10억 원이 생긴다면 잘못을 하고 1년 동안 감옥에 들어가도 괜찮다’라는 항목에 ‘괜찮다’고 답하였다고 하여 충격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래서 국내의 몇몇 학자들은 공익이 사익보다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지 않으며, 실체론적 공익론이 전제하는 국가는 사익주의 공익론이 전제하는 국가보다 오히려 도덕적 기반이 낮고, 공익을 실현한다고 알려진 공적 주체인 공직자들 역시 실은 공익이 아니라 사익 극대화의 주체임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사익에 열등한 도덕성을 부여함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라 주장하고도 있죠.
이에 교육이 현실에 기반을 두고 현실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면 각자의 살림살이를 꾸려가는 지극히 당연한 기제로서 '이익'에 대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언급해야만 할 것 같아요. 이익이란 교육과정 안에서 부정되어야 할 것이 아닌, 개개인의 실생활과 연결되는 자연스러운 구성적 사건일 뿐이 잖아요. 그렇기에 현재의 세계시민교육은 개인의 도덕적 선량함과 호혜적 능력을 강조하는 범애성(Philanthropy)이나 자애성(Charity)을 넘어 개개인의 유익성(Beneficiality)을 담보하고 획득하는 형태로 전환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세계시민교육 내용 안의 예시 상황들은 각자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 속에서 서로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논쟁 과정이 현실적으로 제공되어야 합니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가난한 나라를 도와줘야 한다는 당위성을 넘어 그 안에 연관된 구조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해당 문제가 빚어낼 수 있는 단순한 선악 구도 설정에 주의하며,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과 집단들의 입장을 두루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관련 문제를 구조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만한 영상 및 텍스트 정보의 획득이 필수적이며, 이를 객관화할 수 있는 역할 및 상황 설정 등을 통해 문제 안에 있는 당사자들의 입장을 대면하는 작업 또한 필요합니다.
기존까지 일반적인 세계시민교육의 접근은 세계시민성을 가진 이로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공감 능력을 중심으로 기부 및 기증, 캠페인 등에 참여를 독려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비로움의 실체는 공여자와 수혜자라는 일방향적인 관계 형성이었으며, 이러한 일방적인 관계로는 수혜자들과 한 테이블 안에서 동등한 위치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상호 평등한 관계로서의 이행은 개별적인 이해관계의 문제를 공론의 영역 안으로 밀어 넣어 대화와 토론이라는 조정장치를 통해 상호이익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수 있다. 교육 현장 안에서도 이익의 개념이 지속적으로 부정될 때 어떠한 현실적 지점의 타협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 안에는 표면적인 양보와 일방적인 수용만이 존재할 뿐이죠.
더불어 무조건적인 자애를 베푸는 것은 그것을 주는 이나 받는 이 모두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우려 지점이 있습니다. 마키아벨리와 같은 중세 공화주의자들은 이러한 기부나 봉사 활동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구호나 자선은 타인을 돕는 것을 돕는 자의 선의에 의존하도록 만들기 때문이죠. 이런 구호나 자선은 아무리 칭찬할 만한 경우라 하더라도 시민적 삶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 도움을 받는 사람들의 존엄성에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주는 이들에게는 공화국이 해야 할 의무를 그들이 대의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발생하는 자유의 제한 또한 문제시될 수 있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이상과도 같이 상호 자유로운 관계 속에 녹아있는 사적 이익을 인정했고, 고대 로마인들의 예시를 들며 고대 로마인들은 공공선과 조국을 사랑했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자유와 사적인 이익과 제 몸의 안락도 사랑한 이들이라 믿었습니다.
이처럼 사익과 공익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 사익을 보호할 때 비로소 공동선에 대한 개념에서의 공(共)이라는 의미도 강화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