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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싹 Feb 12. 2018

당신의 균열은 어떤 모습입니까

데미안이 싱클레어의 전유물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우리는 크고 작은 일에 치이며 산다.

타인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을 미처 알지도 못하고 시간만 흘려보내기도 한다.

어쩌면 그건 나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어떠한 금이 갔는지 느끼지 못하고 세월이 훌쩍 지나버리는 날 또한 얼마나 많던가.


그리고 그 크고 작은 금들은

나에게 자잘하게나마 맷집을 키워주기도 하고,

없는 무언가가 비실비실 새어나가게 만들기도 한다. 

새어나가는 것들 중 대부분은 

자신이 눈물인지 분노인지 헤아리지도 못하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시점에 비집고 나오기도 한다.


또는 죽는 순간까지 끝끝내 알아채지 못한 채,

손톱으로 살갗을 긁어내려 간 자국처럼 옅은 흉터로 오랜 시간 남아있기도 할 것이다.

자신에게 생긴 숱한 균열들이 타인을 향해 둔기나 예기가 되어 휘둘리지만 않았다면,

다행도 어떤 방향으로든 자신을 성장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리라. 


나에게 균열이 생긴 순간들을 싱클레어처럼 오롯이 적어 내려갔더라면, 

내 인생의 결은 조금 달라졌을까?

 

지겹도록 학창 시절에 들어왔던, 

하지만 어떤 선생님도 명쾌하게 개념을 일깨워주지 못한 단어.

'자아'


물론 선생님들의 지도능력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깊고 넓은 단어라 가르쳐주기 쉽지 않았으리라. 

분명한 것은 어느 때보다도 '자아'라는 두 음절짜리 단어를 

곰곰이 생각하고 대화해야 했을 시절, 다른 것에 더 신경쓰느라

가장 와 닿지 않는 단어가 되어 버렸고, 결국 다른 관심사에 묻혀 버렸다는 것이다. 

그대로 내 어딘가 깊숙이 잠겨있던 단어. '자아'


그 단어는 20대의 나에게 불현듯 드러나서 나를 힘들게 했었다. 

물론 30대인 지금 명확해지진 않았다.

다만 10대 시절보다는 그 단어에 대해 고민을 하고 조금씩 조각을 찾아 나가고 있다.


책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요즘 중학생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중학생 권장도서 목록'

이것을 보고 있자니, 늘 <데미안>이 상위권에 들어가 있었다.

사실 나 10대가 아니라, 20대 중반에 <데미안>을 처음 읽었다. 

매우 매우 난해하다고 생각하며 읽었으나 다른 후기들은 그 책을 칭송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거 참 좋은 책입디다!'를 연발하고 감동한 체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마치 인간에겐 모름지기 '1인 1 데미안'이 필요하다고 말할 것 같은 에너지로 말이다.


그러다 아이들의 수업을 준비하며 30대 초반에 그 책을 다시 마주했고, 심히 당황스러웠다.


 "책을 좋아하는 나도 이렇게까지 안 읽혀? 내가 그동안 너무 쉬운 책만 읽어왔나."라고 느꼈던 20대 시절의 당황과는 다른 종류였다.


갑작스럽게 싱클레어의 고통이, 싱클레어의 혼란이 읽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혼란에 답을 주지 않는 주변 세상을 향한 실망감도 느껴졌으며 과거의 나의 혼란, 그리고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주고 있을 혼란마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본 단어. '자아'


데미안은 혼란스러워하는 싱클레어에게 한 줄기 빛이었으리라. 

명확한 답을 주지 않고 질문을 던지며 싱클레어가 스스로 대답을 고민하게 만들기도 했고, 괴로운 상황에 부대끼는 싱클레어에게 마치 드라마 주인공처럼 짠 하고 등장해서 상황을 해결해 주기도 하였다.


세상을 두 개의 세계로만 나눠 보고 있던 싱클레어.

당시의 그는 어느 한 쪽, 또는 제 딴에 정해놓은 양 쪽 세계가 같이 망가지기라도 하면 마음 기댈 곳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더 넓은 시야를 갖게 해 주었을 데미안.


사실 싱클레어에게는 데미안 외에도 여러 방법으로 그의 자아를, 그의 균열을 곱씹게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진짜 세상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자신을 붙들어줄 유일한 타인이었을 '부모님'

자신의 비겁함, 자신의 나약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을 '프란츠 크로머'

빛처럼 나타나 주었을 '데미안'

 

그리고 유일한 기둥이었다가, 그저 대단치 않은 평범한 인간으로 다시 보이게 되었을 '부모님'


그의 자극적인 면면을 건드을 '알폰소 베크'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더 광활하게 해 주었을 예술가이자 언제까지고 타인에게 기댈 수만은 없다는 걸 깨닫게 했을 인물,  '피스토리우스'


그리고 자신에게 가장 큰 균열을 주었을 데미안과 꼭 닮아있던 그녀. '에바 부인'


마지막으로 다시 '데미안'


글쎄,

나 역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균열을 만들었고, 그 균열을 보듬어 주기도 하고, 순간순간 또 다른 균열이 되어 나를 아프게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싱클레어만큼, 실같은 흡집 하나하나가 절절히 돋아나는 느낌을 생생히 기억하는 경우가 몇 건이나 될는지.


물론 이건 헤르만 헤세의 글이다.
싱클레어는 실존 인물이 아닌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만난 것은,

매 순간 힘든 발걸음을 떼는 싱클레어가 아니었던가.


기록의 힘은 무서울 만큼 강하다.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기록을 게을리한 일이 많다.

아마 잠깐의 귀찮음을 견뎠더라면 '균열'에 대한 나의 고백 또한 혼란스럽고 넓었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나의 기록 공백이 많았고, 

일기장이 빈 페이지로 나의 게으름을 가만히 깨우며 민망함을 선사해왔다.


그 당시의 나를 나태하고 어리석었다고 하기는 어쩐지 서글프다. 

그래서 괜스레 게을렀던 나를 편들어 주기 위해 자위를 한 번 하자면, 

자아에 대한 고뇌를 싱클레어처럼 호되게 해야만 한다면 내적 성장을 거부하고 싶었을 것 같다.

당시의 나라면 말이다.

그래서 굳이 꼼꼼하게 기록하지 않았다고 해두자.


치열한 기록은 없었으나  나의 성장 역시 참 녹록지 않았다.

고됬고, 외로웠으며, 부끄러운 순간순간들이 나를 괴롭혔다.

내가 좀 더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나를 힘들게 하곤 했었다.


그것이 기록으로 남아있었더라면,

아니, 기록해두지 않았을지라도 내 세포에 각인되듯 생생히 매 순간이 떠올랐다면.

그것은  경이로웠을까

아니면 극한의 괴로움이었을까.

  

학생들과 이 책으로 수업할 때, 조금이나마 책에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데미안과 관련된 음악을 찾아 헤매던 중, '오디너리 피플'의 피아노 연주곡을 세 곡 찾을 수 있었다.

2015년에 발매된 싱글 앨범 'Sinclair'의 전곡이 모두 이야기와 잘 어울려서 학생들에게도 들려주었다.


데미안, 차일드 후드, 싱클레어 이렇게 세 곡이다.

차일드 후드는 프란츠 크로머가 등장할 무렵도 좋고, 싱클레어의 어린 시절 중 어떤 순간에도 어울리는 곡이었다. 싱클레어가 혼란스러워하는 장면에서

오히려 따스한 선율이 주는 역설적인 느낌이 좋았고, 데미안을 만났던 어린 시절에 듣기에도 그것대로 괜찮았다.


그들이 직접 들려주는 곡 해석도 음원 사이트에서(나는 벅스에서 찾았다.) 바로 볼 수 있는데, 공감이 된다.

책을 읽으며 이유 모를 음울한 색채만 느껴졌던 데미안이 '오디너리 피플'의 곡에서는 가장 따스하고 추억 속 구슬 같은 음색으로 구현되어 있다.

갸웃거리다가 곡 해석을 보고 무릎을 쳤다.


분명, 그 혼돈의 시간 속. 

자아라는 단어 따위 골치가 아파서 외면해버린 다른 청춘들과 달리, 

너무나 예민해서 덜그럭거리는 자아를 하나하나 감지했을 

주인공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의 등장은 빛과 같았을 것이다.

눈을 시리게 하는 급작스러운 빛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그보다는 따스한 빛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은은했을 것이다.

간혹 섬광 같은 것이 일어나긴 하지만 그 또한 싱클레어에게는 그 시절에만 볼 수 있는 값진 빛깔이었으리라.


꼬마 싱클레어는 방황 속에서 ‘데미안’이라는 존재를 만나게 되고, 깊은 대화를 시작한다.
Ordinary People_ “‘데미안’을 처음 만났을 때 꼬마 싱클레어는 머릿속에서 종이 울렸을 거라 상상해 봤어요. 그것을 ‘데미안’의 처음 네 번의 울림으로 표현해 보았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끝없는 아르페지오는.. 서로의 대화 속에서 싱클레어 속에서 느껴지는 생각의 흐름을 표현해 보았어요.”

-'오디너리 피플'의 싱글 앨범 'Sinclair' 곡 해석 중-


종소리.

흔히 첫키스할 때 들린다며 갖다 쓰는 표현 '종소리'

-물론 내 귀엔 들리지 않았다.-

귀한 사람을 처음 마주할 때 들을 수 있는 소리라고 상상하면 얼마나 환상적인 경험일까.


이들의 곡을 들으며 다시 책을 읽다보니, 문학작품 테마에 맞는 BGM 앨범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로 만들기엔 너무나 벅차서 그저 책으로서 온전히 가치를 보여주고 있는 <데미안>이 '오디너리 피플'의 곡으로 인해 조금 더 이미지화되고 편안하게 읽혔듯이.

고전이나 문학이라고 하면 지루함을 떠올리는 아이들에게 의미 있는 프로젝트가 되어주지 않을까.


꼬마 싱클레어, 잘 들어! 나는 떠나게 될 거야.
너는 나를 어쩌면 다시 한번 필요로 할 거야.
크로머에 맞서든 혹은 그 밖의 다른 일이든 뭐든.
그럴 때 네가 나를 부르면 이제 나는 그렇게 거칠게 말을 타고,
혹은 기차를 타고 달려오지 못해.
그럴 때 넌 네 자신 안으로 귀 기울여야 해. 그러면 알아차릴 거야.
내가 네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듣겠니?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


적재적소의 순간 많은 이야기를 건네줬던 데미안.

끝끝내 '자신의 안에 귀를 기울이기'가 가장 중요함을 알려주는 데미안.


어느새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데미안이 아니라, 나의 데미안이 되어 있었다.


앞서 언급한 말 중, 

자아에 대한 고뇌를 호되게 해야만 한다면 그걸 외면하고 싶다던 나의 중얼거림을 정정해야 할 것 같다.


이 드넓은 삶에서 디딜 수 있는 작은 발판 하나 정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넘어지든, 멋지게 착지하든, 결과는 내가 감당할 몫이지만 그 여정에 도움닫기가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차피 누구나 느끼고 알아가기 빡센(!) 자아실현, 

조금이나마 더 발을 세게 굴러볼 수 있지 않을까.


하긴, 알고 보면 그런 타인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

쩌적쩌적 금 가고 있는 내 마음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나였다.


아직도 하루하루 생겨나는 나의 균열들. 그때마다 나는 나에게 데미안이 되어줘야만 한다.

아니, 서툰 싱클레어여도 좋다.

나 자신에게 귀를 기울일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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