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고 하면 겸손인 줄 알겠지? 하지만 진실이라네
학창시절, 구로야나기 테츠코의 <창가의 토토>를 통해 그녀의 어릴 때 이야기를 즐거워하며 본 것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보다도 나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은 그 책의 삽화였다.
이와사키 치히로의 따뜻한 그림.
무언가를 잘 하는 사람을 보면, 그게 참 쉬워 보인다.
슥슥 삭삭 하면 그림이 완성되고 조각이 완성되고 예쁜 글씨체가 완성되며, 음악이 있으면 멋진 춤사위와 고운 노래를 들려주는 각 분야의 고수들은 누구나 그것을 할 수 있을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런 분들의 분야가, 마침 나의 관심사와 맞닿아 있다면 나는 순간적으로 생각 짧은 사람이 된다.
그들의 뼈를 깎는 노력, 임하는 마음 같은 걸 생각하기 전에 '왠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을 먼저 하기 때문이다.
이와사키 치히로의 그림을 학창시절에 볼 때 두 가지를 느꼈었다,
참 포근하다는 것.
그리고 나도 '수채화'를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는 것.
원래 그림을 즐겨 그리고, 그림 보는 것을 좋아했어도, 주변에서 "너 화가 해라."라고 할 때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다. 아 물론 화가하라는 제안들은 정말 그림을 놀랍도록 소름 끼치게 잘 그려서가 아니라,
뭔가 잘 흉내 내서 그리는 편인 아이들에게, 으레 껏 어른들이 하는 말 정도로 생각하시면 되겠다.
그런데 이와사키 치히로의 그림은, 그녀가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듯이 나에게도 따스한 기운을 주고 있었다. '너도 물감을 가져다 대는 순간,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고수의 수채화, 그것은 나의 진로 결정에까지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
뭐 결과적으로 나는 전공을 서양화로 선택하지도 않았고, 지금 다른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동네 입시 미술학원을 다니면서 꿈을 꿨었다.
내가 그랬듯이 어떤 계기를, 또는 어떤 위로를 던질 수 있는 동화책 삽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돌고 돌아 아이들과 수업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내가 언제까지 이 일을 할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개인적으로 대학교 전공을 취업의 문으로 생각하는 것에도 반대고, 어떤 일을 할 때 뼈를 묻는 것만이 미덕이 아니라는 생각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면서 자신이 해보고 싶은 일을 해보고 살 권리 정도는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어떤 일을 하든(나만의 기준이고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떤 책임감이나, 추구하는 철학, 목표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걸 나름 세우고 웹툰을 해보기도 했다. 친구와 함께 작업하던 웹툰은 네이버 베스트 도전까지도 갔었고, 하다보니 100화까지 연재했었다.
그리고 새 계정으로 도전만화에서 나홀로 연재를 했다. 아주 조금.
그러다 여러 이유로 긴 휴재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책임감이 부족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야기를 꾸릴 능력은 있되, 일관적인 그림체가 없고, 어느새 손이 뻣뻣-하게 굳어서 내 만화를 봐주는 사람들 상대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고 있었고, 그걸 너그럽게 봐주는 분들도 계셨지만,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웹툰을 하던 시기에도 친구가 그림을 그리고 나는 스토리를 맡았었기 때문에 그림이라 하면 콘티 짤 때의 졸라맨 같은 날림 그림들 뿐이었다.)
1위를 달리는 만화는 아니어도 좋은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펼치고 싶다는 꿈은 여전히 있기에, (개인적으로 네이버 웹툰의 쥬드 프라이데이 님의 작품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 외에도 사실 숨어있는 보석이 참 많다.) 창피한 현재의 그림을 노출하며, 기왕이면 점점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보고자 이 매거진을 시작하게 되었다. 실물에 가깝게 그리는 것이 목표는 아니다. 다만, 나의 스타일을 찾아가고 싶다.
의무적으로 좋은 말을 해주실 필요는 없다. 절대로.
다만, 무분별한 악플만 없기를 바랄 뿐이다.
처음에 뭘 그리면 좋을까 고민했다.
가계부 정리만 하고 고민 마저 해야지 하다가, 몇 년 째 고장도 나지 않고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계산기가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많이 쓸 일이 없어서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인가_싶기도 하고, 그래서 심심하던 차에 붓펜으로 슥슥 그려봤다. 역시, 어마 무시하게 손이 굳어있군.
뭐라고 해야 하나, 얼마만에 느끼는 쑥스러움인지.
그래도 뭐, 시작한 김에.. 마음에 안 든다고 북북 찢어대지 말고 꾸준히 해보려 한다.
뻣뻣, 딱딱하게 굳은 손으로 그린 모처럼의 손 그림으로 매거진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