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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싹 Nov 11. 2015

무릎에 힘을 빡

결국 죽어'져'버리느니

광화문에 주말마다 들러서 자원봉사를 하던 때가 있었다.


학창시절 나에게 자원봉사라는 , 뜻은 좋으나 나에게 그닥 가까이 있는 느낌이 아니었다.

날 잡아서 가게 되면, 길을 나서는 순간엔 귀찮아 하다가도, 막상 가면 약간의 보람감을 느끼는 행위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일정들은 거의 '자원'봉사가 아니라 학교나 단체에서 잡은 것이었다.


학생들과 수업하다 그런 주제로 대화 한 적이 있다.

점수 등의 목적이 있는 선행도 선행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주제였다.

 

어떤 행위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가치판단 토론 때에는 특히나 나의 의견, 나의 표정을 감추는 것에 열중하며 진행하게 된다. 그 날 아이들의 반응은 거의 반반 으로 나뉘었던 것 같다. 목적이 없이 도와야만 선행이다. 목적이 있어도 선행은 선행이다. 팽팽했다.

 토론 후반에 절충 된 의견 중 하나는, 도움 받은 사람들이 즐거워 한다면, 그리고 상대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은 선행이라 봐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기준을 내 광화문 자원봉사에 가져다 대보니 더 어려운 문제로 느껴졌다.


내가 간 목적은, 추려보면 두 가지였다.


1. 살아남은 피해자(그것이 유족이든, 참사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이든), 그리고 떠난 이들의 억울함이 이 추모행위로 조금이나마 달래지기를 바라는 마음.


2. 행여나 텔레비전 뉴스만 보고 이제 다 해결되었나보다 생각할 사람들이 관심을 조금이나마 가져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전자는 달성했는고하니. 푹 패인 그들의 마음이 달래지기는 할런지 알 길 없고, 이승을 떠난 이들의 마음을 헤아릴 방법이 없다는 것 또한 분명했다.


그렇다면 후자는 달성했는가, 모를 일이다. 어쩌면 광화문 추모공간에 온기를 전해주는 이들 중 새로운 사람의 비율보다는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찾아오거나, 그 공간에 거의 상주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더 클 지도 모르니까.


게다가, 학생들이 말한 '선행'의 기준 중 두 번째였던 '상대방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더더욱 비관적이다.



무슨 도움이 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그래도 힘이 되었을거야. 공론화 시켜주고 있잖아.


등의 위로를 해준다면 그 위로의 말이야 주머니 한 켠에 넣어두겠지만, 실질적인 도움. 그것은 과연 얼마나 되었는가라고 생각해보면 무릎이 자꾸 푹 꺾인다.


오며가며 시간 할애해서 적어 준 많은 이의 서명.

그리고 그 사람들의 목소리.


무언가 바꿔보려고 밝혀내려고 하다가 딜레마에 빠지고 다시 일어서다 염세주의가 묻어나기 시작하는 사람들과, 지시를 충실히 따라야만하고 그 와중에 스스로 그 지시에 따르는 자신을 합리화 하며 함께 괴물이 되어가는 사람들.


이들의 완력 낭비.


그리고 살아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

기본적인 원인규명에 대한 요구마저도 돈의 힘, 언론의 힘, 정부의 힘 등. 힘으로 틀어막으려는 모습.


무엇이 '실질적인 도움'이 된 모습인가.


이렇게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나의 자원봉사 의미가 표류하고 있다. 몇 달 동안 밀린 일을 하느라 찾아가지 못했다. (브런치북 프로젝트도 포기했었다. 애석.)하지만 밀린 일이 모래성만큼 쌓였든 산만큼 쌓였든, 무언가 하나라도 상식적인 해결에 물꼬가 트인다면. 까짓거. 두 시간 거리가 문제랴 가고 또 가고 기꺼이 주말을 할애했을 것이다.


더 끔찍한 하루하루를 맞이하는 이들이 그 곳에 있는데 내가 먼저 지쳐버린 것인가.


라고 쓰다보니 이 글을 완성하고 싶지 않은 민망함도 밀려들기는 한다.


하지만, 어차피 선행 상장.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기위한 일이 아니었으니.


"이게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있나?"라는 질문따위.

"이거 잘하고 있는 행동 맞나?"라는 의문따위.


접어두자.


그냥 나의 고집이고, 내가 더 나은 세상에서 살고 싶어 움직이는 지극히 나를 위한, 개인주의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자.


나에게 허락된 자투리 시간, 나에게 엉겨붙어있는 자잘한 재주를 이용해서, 내가 살고싶은 상식적이고 살아있는 것이 보호받는 세상을 만들기위해, 나만 생각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개인주의가 다행히 타인을 해하거나,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운빨 좋은 사람이다 내가.


라고 생각해보니 지쳐서 꺾여있던 무릎도 조금 펴지고, 한동안 '자원'하지 못했던 봉사활동에 대한 미안함도 한결 나아진다.



성공적인 합리화다. 그래도 어쩌겠나. 자괴감과 딜레마만 가지고 살기에 너무 숨 찬 세상아닌가.


다만 이 숨 차고 버거운 곳에서 비단 세월호의 유족이 아니더라도, 신문 기사 한 꼭지라도 실리지 못하고 공론화 한번 시키지 못하며 혼자 허덕이는 무언가의 피해자들도. 하루하루 합리화를 해 나가실 수 있기를. 그렇게 또 무릎에 힘을 주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오랜만에 올리는 글인게 여실히 드러나는 스케치북 날짜.








역시 실물이 더 낫.. 지만 그냥 봐주시라. 매거진 제목부터 '굳은 손'이라 자수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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