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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채움 Sep 01. 2020

이 시국에 여행사 마케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괜찮냐구요? 아니, 그럴 리가요!

녹록지 않은 마케터의 삶

 나는 마케터다. 그런데 자사 상품을 팔아선 안된다. 사람들이 우리 회사의 상품을 이용할수록 질병이 전파되기 때문이다. 내가 마약을 파는 것도 아니고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 상품을 드러내서 팔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정말이지 2020년은 혼란의 연속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거의 대부분의 업종이 타격을 입은 듯하다. 그중에서도 여행/항공은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업종이다. 출근해 매일 아침 매출을 확인하면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찐 문과인 내가 얼추 계산을 해봐도 도저히 회사가 운영될 만한 숫자가 아니다. 내가 있는 여행회사는 그나마 외국계인 데다 규모가 어느 정도 있는 편이라 운 좋게 버티고 있다. 대부분의 여행사는 이미 망했거나, 망해가고 있거나 둘 중 하나다. 지난 2분기에만 여행사 444군데가 폐업했고, 7개월 동안 총 730곳의 여행사가 휴/폐업을 했다고 한다. 직장인들의 익명 커뮤니티인 블라인드의 여행사 라운지에선 길어진 무급휴가에 절망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렇다고 놀고 있진 않습니다

 코로나가 터진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해외 여행객에게 판매하던 상품들을 국내 여행객 대상으로 변경한 것이다. 예를 들면, 한국에 놀러 온 외국인에게 판매하던 일일투어, 원데이 클래스 등을 한국인에게 판매하는 방식이다. 이미 많은 국내 업체들이 확보되어 있다는 점은 다행이었지만, 애초에 한국인 타깃으로 만들어진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상품이 가진 경쟁력이 크진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 소비자들에게 맞춘 상품들은 늘어났지만 이미 국내 여행을 꽉 잡고 있는 경쟁사들이 있어 이 역시 쉽진 않았다. 또, 해외여행을 갈 땐 사람들이 단일 투어상품, 티켓 패스, 식사권 등을 많이 사용하지만 국내여행에선 그런 상품들을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이젠 최대한 여행과 관련되어있(다고 어떻게든 엮어보려는)는 상품(이지만 과거의 우리가 이런 것들을 팔 것이라곤 전혀 생각 못했던)을 찾아내 팔기 시작했다. 우스갯소리로 한창 마스크 대란이 일어난 시절, '이럴 거면 저희 마스크나 팔죠'라고 장난을 쳤는데 진짜 마스크를 파는 여행사가 있어 너도 울고 나도 울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거의 없다시피 한 국내 여행 수요와 이미 유리한 조건을 선점한 경쟁사들.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어떻게든 매출을 만들어야 했다. 여행을 갈 수 없으니 여행사에서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시도를 하며 죽을 둥 살 둥 일하고 있다. 간절한 마음으로.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우는 마케터는 처음인가요

 타깃도, 시장도, 일하는 방식도 바뀐 상황에서 정신없이 열심히 달려왔다. 그 질주의 끝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던 건 '코로나 대유행'이라는 벽이었다. 수도권을 시작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시행되었다. 우리의 매출을 하드캐리 하던 업체에서도 속속 확진자가 발생했다. 일하는 양과 성과가 정확히 반비례하는 상황에 웃음이 날 지경이지만 웃으면 안 된다. 지금 여행사 직원이 웃으면 그것은 '희망'이나 '극복'이라는 단어보다는 '실성'과 같은 단어들이 붙여질 테니까.


 '마케터'라는 나의 직업을 사랑한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매일이 회의감으로 가득하다. 무언가를 계속하고 있는데 달라지는 것이 없다. 성과가 나지 않으니 일이 신날 리가 없다.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이게 정말 할 수 있는 게 없는 건지 내 역량이 부족해 길이 보이지 않는 건지를 모르겠다. 답답한 마음에 공부를 해보려고 해도 어떤 부분을 건드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 속에서 내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전혀 모르겠는 상태... 대학교에선 팬데믹에 마케터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연륜이 좀 있었으면 나았을까. 2년 차에게 코로나 바이러스가 안겨준 현실은 가혹하다.



그럼에도 행복한 이유

 참아왔던 설움(?)이 터져 우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 인생이 불행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즐거운 마음으로 회사를 다니고 있다. 그럴 수 있는 건 여전히 회사 분위기가 좋기 때문이다. 회사가 어려운 상황일수록 다른 사람 탓을 하고 서로에게 험악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옥죄는 상황에선 누구나 현실에게 질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좋은 동료의 중요성은 위기 상황에서 더욱 빛난다.

 나의 곁엔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임에도 어떻게든 헤쳐나가려는 팀원들이 있다. 혼자서 성과에 좌절하다가도 막상 회의에 들어가면 좋은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고심하는 나 자신에게 놀라곤 한다. 같이 좌절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먼저 일어나서 나의 손을 잡아끄는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고심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현실보다는 미래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여행사 직원임에도 삶에 큰 타격 없이 그냥저냥 살아갈 수 있는 건 순전히 동료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국에 여행사 마케터로 일한다는 것은 결국 성과를 낼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동료들과 웃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든 시도가 좌절되어도 결국엔 다시 일어나는 법을 연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2년 차 마케터가 / 첫 직장에서 / 업종 전체가 걷잡을 길 없이 망해가는 과정을 경험한다는 것. 삶 전체에 이 경험이 미칠 긍정적인 영향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기에, 감히 귀하고 값진 시기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하지만 이제 충분히 경험했으니, 어서 다시 솟아오르고 싶다.


 내가 웃을 수 있는 건 어쩌면 언제든 이 업계를 떠날 수 있다는 이기적인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마케터'만 할 수 있다면 어떤 업종이든 상관없다 주의였고, 그렇게 여행업에 인연이 닿아 일을 시작했다. 최대한 다방면의 마케팅을 경험하는 것이 목표기에 코로나 바이러스와 상관없이 다음 직장은 전혀 다른 업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겪고 나니, 같은 업계 종사자들과 묘한 소속감과 연대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을 개개인들. 그리고 그들의 인생을 생각한다. 여행을 사랑해 관광업을 택한 사람들, 관련 학과에서 열심히 꿈을 키워왔을 학생들,  평생 몸담아왔던 업계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살고 있는 사람들.  순간꿈과 일터를 빼앗긴 그들의 심정을 감히 상상할  없다.  훗날 어디선가  시기를 함께 버텨온 어행업계 종사자를 만난다면,  한잔 기꺼이 기울이며 오늘의 고난을 털어놓을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때의 우리는   어떤 업계의 사람들보다 밝게 웃고 있기를, 소망하고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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