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지만 쓸쓸했던 그 한 달의 기록
코로나 19로 인해 계획에 없던 무급휴가를 갖게 되었다. 본사는 처음에 3개월 무급휴가를 제안했으나, 일단 3월 한 달의 휴가를 갖는 것으로 얘기를 마무리 지었다. 휴가 중 권고사직이나 또 다른 무급휴가를 제안할 까 두려웠다. 다행히 국가의 지원을 받아 원한다면 4월, 5월에는 유급휴가를 가질 수 있다고 한다. 그 기간에는 고용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그리하여 맘 편히 놀고먹었던 3월 무급휴가의 기록이다.
오전 11시, 사촌언니의 신혼집에서 눈을 떴다.
“아
무급휴가
진짜 x나 끝장나게 좋은 거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무급휴가를 갖기 싫어했던 내 생각이 아주 잘못된 것임을 깨달으며 휴가 첫날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바빠 오지 못한 사촌언니의 신혼집에서 2박 3일의 장대한 집들이를 했다.
새벽 네시까지 언니, 형부, 사촌동생과 술을 마시고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 밥을 먹고 공기놀이를 하고 산책을 하고 다이소에서 쇼핑을 하고 영화를 보고. 밤낮이 바뀐, 우리만의 시공간에서 우리는 맘껏 먹고 마시고 웃고 행복했다.
미뤄왔던 허리 치료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세 번씩 꼬박꼬박 오세요’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실천할 수 없어 6개월을 미뤄온 일이었다. 버스로 왕복 1시간, 물리치료 1시간, 대기 1시간 도합 3시간이 걸리는 일을 일주일에 세 번씩 했다. 괜찮다, 나는 돈도 없고 일도 없지만 시간은 많으니까! 아픈 곳을 치료받을 수 있는 삶이란 실로 행복한 것이로군.
강아지를 키워본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강아지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음을. 아니, 사실 강아지는 우리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을 안다. 백수 때 나의 방에서 살던 강아지는 취직 이후 내 방에 왕래를 끊었다. 대신 산책을 자주 가주는 엄마 옆에 늘 똬리를 틀고 있었다. 무급휴가 일주일 만에 내가 백수가 된 것을 간파당했다. 그는 나의 방에 자리를 깔았다. 눈치를 한껏 주다 제 풀에 지쳐 잠을 잔다. 농성하듯 꼭 내 옆에서 잔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마운 일이다. 덕분에 매일 한 시간 반씩 강아지에게 산책'당했'으니. 뜻밖의 건강 지킴이었달까... 비록 산책이라는 목적을 달성한 후엔 내 방에 코빼기도 안 비추었지만. 쳇.
오전에 동생이랑 강아지 수제 간식을 만들었다. 강아지 사진을 옆에 두고 ‘시어머니가 보고 있다’는 마음 가짐으로 열심히.
오후엔 엄마랑 사람 간식을 만들었다. 요리를 싫어하지만 요리를 좋아하는 엄마, 동생 덕분에 자꾸 시다 일을 한다. 덕분에 요리가 더 싫어지고 있다.
2년 만에 머리를 했다. 출근 길이 장장 편도 1시간 50분이기 때문에 멋이란 멋은 다 놓고 살았다. (라고 하기엔 원래도 안 꾸미......) 매일 쌩얼에 대충 묶은 머리로 출근하다 보니 머리를 할 필요성조차 못 느꼈다. 오래간만에 머리를 자르고 파마를 했고 그렇게 15만 원을 들여 이렇게 되었다. 퇴근하는 아빠에게 ‘삼각김밥 시키신 분?’하고 등장했고 가족들이 모두 빵 터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삼각김밥 아닌데?’ 혹은 ‘머리 예쁜데 왜’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마케터에서 삼각김밥으로 직종 변경에 성공했다.
코로나 19로 일자리를 위협받았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티스토리 블로그를 열었고 브런치 작가에 도전했다. 무급휴가가 준 선물 중 하나가 바로 이 ‘브런치 작가’라는 명함이다. 불행은 불행만 주지 않는다는 것을 또 한 번 배운다.
낮밤이 바뀌어 잠이 안 오는 날엔 영화를 본다. 추천을 받아 본 ‘윤희에게’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 주는 무게와 아픔의 크기를 다시 한번 가늠해본다. 싫으면서도 좋은 아득한 기분.
코로나 19는 나의 월급뿐 아니라 가장 친한 팀원도 앗아갔다. 우리 팀끼리 작게 송별회를 하려 한 달 만에 회사로 갔다. 능력 있는 사람이기에 그녀의 앞길이 걱정이 되진 않았다. 걱정은 우리였다. 회사의 추한 민낯을 보고도 계속 일해야 하는. 상처를 치료해줄 사람 어디 없나 가만히 놔두다간 끊임없이 덧나(feat.아웃사이더)
소비의 폭이 늘었다. 돈을 잘 쓰지 않는 편이다. 딱히 갖고 싶은 게 많지도 않고 또 돈 쓰는 기쁨보단 돈 모으는 기쁨이 커서. 하지만 이번 달만큼은 의도적으로 자제를 하지 않았다. 수입이 없다는 슬픔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돈 없어서 뭘 못한다는 생각을 안 하려 고민의 시간을 주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사고 싶은 마음이 들면 바로 샀다. 그리하여 추워서 아직 입지도 못한 봄옷도 사고, 적적한 잠자리를 채워줄 무드등도 사고, 필름도 사고, 책은 더 많이 사고, 가방도 두 개나 샀다. 최고의 소비는 바로 강아지 장난감. 오랜만에 사 준 장난감을 가지고 세상 재밌게 노는 강아지를 보며 미안했다. 누나가 뭐 대단한 일 한다고 너 장난감도 안 사주고 있었다냐 흑흑. 앞으로 잘할게 꿈이 ❤️
4월 5일, 그러니까 원래로 치면 월급을 받았어야 하는 날, 엄마로 부터 특별재난지원금이 날아왔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월급날이라는 것도 모르고 지나갔을 테지만. 덕분에 마지막까지 슬픔이 들어올 틈 없이, 말 그대로 빈틈없이 행복했다. 월급은 없었지만 이곳저곳에서 온정의 손길(?)을 받고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놀고먹었다. 더없이 행복한 3월이었다.
팀원들 중에 가장 무급휴가를 갖기 싫어했던 사람은 나였다. 괜히 ‘무급휴가’라는 단어가 무겁게 느껴졌다. 코로나 19가 아니었으면 겪지 않았을,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니까.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했고, 다시 일 없는 백수가 된 것 같아 슬펐다. 하지만 직접 경험해 보니 무급휴가는 가뭄 속 단비 같은 시간이었다. 한 달치 월급을 반납한 휴가지만 휴가는 휴가고, 휴가는 언제나 진리고, 그리하여 한 달 월급, 그 이상을 바쳐도 좋을 만한 꿀휴식이었다. 그러니 무급휴가를 걱정했던 나 자신과 주변인들의 걱정은 기우였다. 한 달을 쉬니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진짜 문제는 무급휴가 자체가 아닌, 그 과정 속에 상처 받은 나였다고.
돌이켜보면 무급휴가를 가기 전까지가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회사는 어떤 공식적인 발표도 없이, 각자의 상사를 통해 압박과 협박을 해왔다. ‘비행기 값과 숙박비를 대 줄 테니 원하면 한 달 쉬다와’라고 말하던 제안은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아 ‘떠나지 않으면 너나 팀원을 자르겠다’는 협박으로 변해 있었다. 주어진 고민의 시간은 단 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본사와 떨어진 해외지사다. 회사를 나가야 하는 상황인 건지, 무급휴가를 가야 하는 건지, 차라리 해고당하는 게 나은 상황인 건지, 나름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데 사람들마다 알고 있는 정보가 달랐고, 본사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각 팀마다 흘려들은 정보들을 조각 맞추기 하기 바빴고, 새로운 소식들이 업데이트될 때마다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했다. 회사에서 느끼는 감정 소모가 나를 가장 지치게 했다.
코로나 19로 회사가 어렵다는 것, 그런 상황에선 직원을 무급휴가 보낼 수 있고 해고할 수 있다는 것쯤은 우리도 이해한다. ‘회사가 어려워서 그래. 미안해’라는 한 마디면 되었을 텐데, 우리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것을 명시한 공지라도 있었으면 좀 나았을 텐데. 그런 기본적인 것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과정이 더 상처로 다가왔다. 그래도 함께 일했던 사람이고 가끔 얼굴 보며 안부 물었던 사이인데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지.
3월 한 달, 놀고먹으며 잘 쉬고 있는 동안 본사에선 사람들이 더 잘려나갔다고 한다. 1차, 2차 이런 수식어도 없이 노동청의 눈을 피해 조용히 한 명씩 해고했단다. 나도 모르는 사이 팀원들을 계속 잃고 있었다. 한국의 한 패션회사에서는 55명을 당일 해고했다고 한다. 너가 나가지 않으면 너의 팀원이 잘린다는 협박이 낯설지 않다.
모두가 힘든 시기인 것을 안다. 모든 곳이 차갑다. 하지만 그 차가움을 더 냉혹하게 만드는, 불필요한 차가움들이 있다. 힘들다는 이유로 타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자. 코로나 19는 종식될 수 있어도,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