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워지는 연습 중입니다

Ep1 내가 세상을 누비는 동안 아버지의 몸엔 암세포가 퍼지고 있었다

by 이니두아

여행을 떠나자는 남편에게 나는 부모님은 어떡할 거냐고 물었었다.

경인이 입장에서는 ‘그냥 일 년 여행 다녀오는데 무슨 부모님 걱정이야..?’라는 생각이 들었을 테다.

나는 그간 주기적으로 집에 찾아오는 큰 위기들 (가족들이 시간과 노력을 합쳐야 했던 경험들) 때문인지,

또 나 자신이 이번에 여행 가면 정말 해외 나가서 살겠다는 결정을 할 것 같다는 육감이 있어서인지, 세계여행과 부모님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가족들의 질병이나 죽음에 대해 두려웠다.


평소 몸이 약한 엄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 내가 별거 아닌 일 -이를 테면 카페에 가고,

매일 보는 친구들을 또 만나는- 로 찾아뵙기를 미룬 할머니를 다시 못 보고 후회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


또 언니와 나이차이 많이 나는 늦둥이로 태어나서인지.. 뭐랄까 부모님과 함께한 시간에 대한 자격지심 비슷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 인간적으로 저희 부모님은 최소 85-90살까지 사셔야 되는 거 아시죠?’라고 따지듯 말해보기도 했다.

병원은 안 갔지만, 아마 오랜 불안증이 내 안에 있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은 공부 중에도, 근무 중에도,

심지어는 여행 중에도 매우 갑자기 나의 마음을 심연에 빠뜨리고 해야 할 일들에 집중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보다 단순해지고, 과거/미래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모습에 조금 더 가까워지면서 이런 불안한 마음들도 많이 완화가 되었다.

그리고 경인에게 ‘나 이제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고찰을 내려놓고, 가족들에 대한 이상한 걱정과 부채감도 내려놓고 내 현재의 삶에 집중하며 살겠어!’라고 선포까지 했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아간 한국에서 약 4개월간 한국의 집과 차 등 살림살이를 처분한 뒤 6월 8일 날짜의 발리행 비행기를 예매했다.


6/5 아빠가 갑자기 응급실에 가셨다.

6/7 입원해서 정밀 검사를 진행했다.

정확히 병명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몸의 모든 수치가 저하되어 있고, 빈혈이 너무 심하단다.


다음날 출국이기에 아빠를 뵈러 갔다. 컨디션은 안 좋지만, 대화도 잘 나누시고 손주들을 번쩍번쩍 안아서 놀아주기도 하셨다.

앞으로 할 일들이 많을 텐데, 아빠랑 한국 일들은 신경 쓰지 말고 내일 출국 잘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6/8 인도네시아로 출국했다.

출국하는 게 맞나 싶었지만.. 그래도 가야지 뭐 어쩌겠어. 아직 밝혀진 것도 없고 하니까 일단 잘 다녀오자 라는 마음.

가족들도 내가 가서 일처리 잘하고 오는 게 도와주는 거라며 응원해 줬다.

이번엔 정말 자리를 잡으러 가는 것이기에 여러 가지 감정들을 느끼며 인도네시아에 도착했다.

매일 가족들과 전화하며 아빠의 상태를 체크했지만, 아직 정확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조금은 심각한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6/14 나만 몰랐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발리에 도착한 다음 날 콘텐츠를 위해 발리 워터밤에 갔는데 생각보다 너무 재밌어서 진심으로 즐겁게 놀고 있었다.

점심 먹으면서 아빠 상태 체크를 위해 언니에게 전화했는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의 깊이를 200% 이해하게 되는 언니의 말.


‘사실 너 갈 때부터 의심되는 증상이 있었는데, 엄마아빠가 괜히 새롭게 출발하는 애 신경 쓰이게 말하지 말라고 하셔서 말 안 했어.
정확한 타입은 확인해 봐야겠지만 아빠 혈액암이고, 그중 백혈병이래.‘




우리 아빠는 올해 70세.

나를 늦게 낳으셔서 내 또래 부모님들보다 훨씬 나이는 많으시지만, 키도 크시고 건강하고, 항상 동안이라는 말을 듣고 사시는 분.

그렇기에 아빠가 건강하지 않다. 심지어 위중하다.라는 사실이 참 믿기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너무 따뜻했던 발리의 햇살과 평화로운 워터밤의 분위기는 온 데 간 데 없고 머리부터 발 끝까지 서늘해지고, 온몸이 굳는 것 같았다.

수영복 입고 뛰노는 사람들 사이에서 남편과 같이 한참을 울었다.

결국 촬영을 다 끝내지 못하고 집에 와서 한참을 울고, 기도하고, 원망하고, 자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