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5월에 걸맞지 않는 찬바람과 비가 몰아치는 날이었습니다. 계절성 폭우의 영향으로 내일까지 쭉 비가 내린다고도 했던 것 같습니다. 오토바이를 타며 바람을 가르니 뼈가 시릴 정도로 춥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초가웅 마을 주민 300명이 한 달 동안 먹을 식량을 사러 가는 날입니다. 사실 넉넉하게 2톤어치를 준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사회 초년생의 얄팍한 통장이 허락해주지를 않았습니다. 쌀을 1톤치 사보는 건 처음이라 어느 정도 규모일지 가늠이 잘 안됩니다. 식량 지원을 업으로 하는 단체에서 일한다고는 하나 입사 1년도 안된 햇병아리다보니 아직 배급 현장에 가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게 받아본 쌀 1톤은 제 생각보다 훨씬 부피가 컸습니다. 설탕과 소금 각각 1 킬로그램, 식용유 1리터, 렌틸 콩 1킬로그램, 콩고기 1팩을 마저 넣고나니 이걸 어떻게 다 옮기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비 때문에 거의 무너져내리다시피 한 산길을 뚫고 트럭을 몰고 싶어하는 기사는 한 명도 없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예약해 둔 트럭 한 대가 급하게 취소되고 새로운 운전 기사를 구하는데 꼬박 세시간이 걸렸습니다. 돌고돌아 어렵사리 마을에 도착하니 몇몇 주민분들은 이미 옹기종기 모여 저희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준비해 온 마스크를 나눠드리고 있자니 어머님들이 따뜻한 차를 내밉니다. 배급을 마치고 마시겠다고 해도 추우니까 몸 식는다며 당장에 마시라고 하십니다. 달달한 찌아를 홀짝이고 있자니 아이가 다가와 작은 민트 사탕을 하나를 손에 꼭 쥐어줍니다. 이 작은 사탕이 뭐라고, 발끝까지 싹 젖어 오들오들 떨며 고생하던 시간들이 그세 옅어지며 하라면 한 번 더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 쌀들이 아이들 입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 켠에 슬며시 행복감이 차오릅니다. 이 렌틸 콩은 아마도 다진 마늘과 양파, 강황 가루와 각종 향신료와 어우러져 담백한 맛이 일품인 네팔식 백반 달밧이 될겁니다. 아이들이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불평을 늘어놓기는 하지만 누군가의 식탁을 채울 수 있다니 저도 참 괜찮은 직업을 고른 것 같습니다.
2021년 6월 10일의 기록
식량 전달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궁금하신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초가웅 마을 72가정에 매달 식량을 전달할 계획이라고 말씀 드렸었는데, 초가웅 인근 마을에도 상황이 어려운 주민분들이 계시다고 들어 이번주 중으로 툴로가웅(Thulogaun) 마을 20 가정에 한 달치 식량을 추가로 지원할 예정입니다. 전부 소중한 마음을 모아주신 여러분 덕분입니다. 초가웅 마을에는 예정대로 다음주에 식량을 전달하러 가게 될 것 같습니다. 이곳 네팔에는 몬순 장마철이 시작되었는지 매일 같이 비가 쏟아집니다. 비가 온 뒤에 산길이 무너지면 식량을 운송하기 위한 트럭이 지나가기 어렵기 때문에 상황을 보아 적당히 땅이 마른 날 진행하려고 합니다. 마을에 다녀오고 나면 또 이런저런 이야기와 사진들을 들고 오겠습니다.
2021년 6월 21일의 기록
삼시세끼 에세이를 쓰기 시작한지 어느덧 한달이 되었습니다. 사실 가장 먼저 알려드리고 싶은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소중한 마음을 모아주신 덕분에 계획보다 좀 더 많은 분들에게 식량을 전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6월 20일), 툴루가웅(Thulugaun) 마을 20가구에 추가로 식량을 전달드리고 왔습니다. 툴루가웅 마을은 지난달 72가구에 식량을 전달한 초가웅(Chogaun)마을에서 약 20분 정도 떨어진 곳으로, 마을 주민분들 대부분이 소규모로 농사를 짓거나 일용직에 종사하고 있어 코로나의 영향으로 수입에 큰 타격이 있는 지역입니다. 가정마다 쌀 30킬로그램, 설탕과 소금 각각 1킬로그램, 식용유 1L, 콩고기 1팩, 그리고 비누를 전달드렸습니다.
다음주에는 예정대로 초가웅 마을에 식량을 전하러 가기 위해 준비 중에 있습니다. 지난달 리스팅 작업을 서둘러 하느라 미처 반영하지 못한 6가구를 추가해 총 78가구에 한 달치 식량을 지원 드리려고 합니다. 이번주 들어 몬순으로 인한 홍수 피해가 계속 들려오고 있습니다. 특히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수십명이 실종되고, 수백 마리의 가축들이 익사했다고 합니다. 저희의 바람과 노력이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에게 닿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무엇보다 네팔의 코로나 상황이 개선되어 하루 빨리 주민분들이 일터로 돌아가고, 아이들은 학교에 갈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7월 10일의 기록
오늘은 오랜만에 마을에 다녀왔습니다. 지난 두번의 배급 때는 어김없이 비가 쏟아져서 고생을 했는데 운이 따른건지 아주 맑은 아침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총 85가구에 한 달치 식량을 전달했고, 지원품은 지난 배급과 마찬가지로 쌀, 렌틸 콩, 식용유, 설탕, 소금, 그리고 비누로 구성했습니다. 식량을 실은 트럭과 함께 마을에 들어가니 내리쬐는 따가운 햇살을 피해 그늘마다 옹기종기 앉아 기다리는 마을 주민분들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기를 당부드렸지만 착용을 잊으신 몇몇 주민분들에게 재빠르게 마스크를 배부드리고 바로 배급을 시작했습니다.
가게 앞에 앉아있는 아주머니들에게 이번 달은 상황이 좀 어떠셨는지 물어도 보고, 에세이에 쓸 사진도 찍으면서 흐르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는데 저 멀리서 어느새인가 들꽃을 뜯어 온 아이가 다가와 조용히 꽃을 내밉니다. 새벽에 내린 빗물이 이슬이 되어 맺히고 채 마르지도 않은 진분홍색 꽃입니다. 집에서 마을 공터까지 천천히 걸어서 5분이 걸리는 거리. 오늘 아침 가장 예쁘게 핀 꽃을 찾아 눈으로 쭈욱 쫓으며 흙길을 따라 자박자박 걸어 왔을 아이의 모습이 선연하게 그려집니다. 조심스럽게 꽃을 받아 들어 카메라 가방 손잡이 부분에 곱게 꽂아 장식합니다. 투박한 검은 카메라 가방이 오늘 따라 참 예쁘게 보이는것 같습니다.
마지막 식량 포대를 전달하자마자 아이들이 안보는 곳에서 재빨리 정산을 마치고 꼬깃꼬깃한 수기 영수증을 챙겨 넣었습니다. 그러고는 저 만치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 손에 이끌려 흙길을 걸어 디피카네 집으로 향합니다. 새벽에 내린 비에 자박하게 젖은 흙길에서는 여름의 냄새가 납니다. 디피카네 어머님이 가꾼 텃밭에서 팔뚝만한 네팔 오이를 뚝뚝 뜯어 양손에 들고, 어니사네 집 앞에 열린 배 나무 밑에서 주먹만한 배를 몇 개 주워담습니다. 도중에 한 달 전부터 승지 디디(언니) 언제 오냐고 매일 물어봤다던 아잡띠네 집에도 들렸습니다. 아잡띠는 말수가 적고 조용한 아이입니다. 활발하게 뛰어노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집안에서 책을 읽거나 학교에서 배운 것을 복습하는 걸 더 좋아하는 그런 아이입니다. 할머니랑 언니들한테 제가 언제 또 놀러올지 그렇게 물어봤다면서 막상 만나고나니 눈에 반가운 기색은 비치는데 저에게 직접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먼저 다가가 팔을 벌리니 그제서야 '퐁' 하고 안겨옵니다. 아빠 다리하고 오순도순 모여 앉아 방금 뜯어 온 오이와 배를 뭉텅뭉텅 썰어 우적우적 입에 넣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새빨간 칠리 파우더를 소금에 섞어낸 것에 이 여름 오이와 배를 찍어서 먹습니다. 오이는 그렇다치고 배에 칠리 파우더를 찍어 먹는 것이 새로웠는데 배에서 나는 달큰상큼한 향과 매콤짭조롬한 칠리 파우더의 조합이 제법 나쁘지 않습니다.
시원하게 아작아작한 오이와 배를 잔뜩 먹고 제 배 한 번, 아이들 배 한 번 번갈아 통통 두드리다 바닥에 싹 눕습니다. 잠시 후 제가 집에 돌아가려고 침대에서 일어나자 아잡띠가 순식간에 헤드락을 시전합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쵸리까지 와아앙! 소리를 지르며 가세하자 은근히 무거운 7세와 3세에게 짓눌려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엎지락 뒷치락 실랑이 하다가 멀리서 지켜보던 할머니에게 된통 혼나고 나서야 겨우 놓아줍니다. 아주머니들이 바리바리 싸주신 오이를 오토바이에 싣고 마을을 나섭니다. 물기 어린 공기가 못내 텁텁한, 늦여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