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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지 Mar 11. 2023

불결함에 대하여


네팔 지진 직후 몇몇 마을에 식량을 전달하는 봉사활동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한 달치 식량을 한 번에 전달하는 지금과는 다르게 일주일에 4번 정도 식자재를 싣고 방문해 공터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조리를 한 후 한 끼 식사를 배급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솥에 물을 붓고 밥을 짓는 사람도, 네팔식 김치인 아짤을 만들기 위해 토마토를 으깨는 사람도, 달밧에 들어갈 녹두 스프를 걸쭉하게 졸이는 사람도 모두 남성이었습니다. 처음엔 약간의 의아함만 가졌을 뿐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오히려 동네 아저씨들이 이렇게 요리에 적극적인걸보니 집안일도 어련히 함께 분담하겠거니 싶어 지나가는 말로 감탄을 내뱉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현지 코디네이터가 정색하며 건넨 한 마디에 저는 완전히 얼어붙었습니다. 조리대에 선 사람이 전부 남자인것은 외부인이 이렇게 많은 '공적인' 장소에 여자가 요리하게 두면 부정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순간 머리를 얻어 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는 생리 중인 여성은 불결하다고 여겨져 종교 의식이나 장례식은 물론 부엌 출입조차 허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가부장제적 사회 질서 속에서 여성의 신체와 생리 현상이 남성 중심적으로 해석되며 세워진 보이지 않는 견고한 차별과 배제의 벽이 선연하게 눈에 보이는듯 했습니다.



네팔 서부 지역에서는 차우파디(Chaupadi)라고 불리는 관습이 남아 있습니다. 차우파디에 따르면 생리 중 혹은 출산 직후의 여성은 가족과 격리되어 헛간이나 창고에 머물러야 합니다. 격리된 여성들은 열악한 위생 환경과 혹독한 기후, 독사와 각종 곤충을 비롯한 짐승들의 공격과 더불어 성폭행의 위험을 감당해야만 하죠. 여성의 생리를 불결함으로 규정하고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는 방식으로 가부장제적 위계 질서를 강화하고 가정 내 권력을 공고히하는 악습이 문화와 관습의 탈을 쓰고 반복되어왔다는 것에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의 분노와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3만원짜리 목숨


차우파디에 의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매년 끊이지 않자 네팔 사법당국은 2005년 차우파디를 불법으로 규정하며 격리를 강요한 원고에게 최고 징역 3개월이나 3천루피(한화 약 3만원)의 벌금형에 처하는 법을 도입했습니다. 생리 현상을 이유로 여성을 강제적으로 격리해 죽음에 이르게 한 죄의 벌금이 단돈 3만원입니다. 


여성의 생명과 목소리를 경시하는 사회 구조와 네팔의 열악한 성생식보건 상황은 무관하지 않습니다. 네팔은 모성 사망이 매우 높은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네팔의 모성사망비는 1996년에는 10만명 당 539명이었으나 2016년에는 239명까지 감소했습니다. 수치만 놓고 보면 20년 동안 2배 이상 감소한 셈이지만 네팔의 높은 출산율을 감안해 계산했을 때 아직도 1년에 약 1,100명의 산모가 아이를 낳다가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 2019). 


한국의 경우 모성사망비는 10만명당 10명 정도인데 이는 네팔에서 아이를 출산할 경우 한국에서 아이를 출산할 때보다 산모가 사망할 확률이 24배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네팔의 모성사망률이 이렇게 높은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요. 모성사망의 사회구조적 원인으로는 크게 3가지 지연(Delay)을 들 수 있습니다. 첫째, 의료적 조치를 받기 위한 자기결정권의 부재로 인한 지연. 네팔의 산간 지역에서는 병원에 가기 위해 남편 혹은 시어머니의 허가를 얻어야 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가부장적 전통과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 하에서 여성이 자신의 성생식건강에 대해 독립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또한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문화 및 사회적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출산 직후의 여성을 격리함으로 인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둘째, 낮은 의료 접근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지연. 열악한 교통과 제반 시설, 도로 상황 그리고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여성들이 의료 기관에 물리적으로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네팔 시골 지역의 80%가 험준한 산악 지형인데다가 5월 말부터 약 3개월에 걸쳐 지속되는 우기 철에는 더더욱 병원에 가기 어렵습니다. 네팔 도시 지역 여성의 약 74%가 임신 관련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권고되는 약 4회의 산전케어를 받은 반면, 중서부 시골 지역에 거주하는 여성은 약 31%만이 같은 횟수의 산전케어를 받았습니다. 의료 설비가 갖추어진 병원에서 의료진의 관리하에 출산하는 확률은 농촌 지역에서는 20%로 매우 낮은 반면 도시 지역에서는 약 75%로 나타났습니다. 


셋째, 낮은 퀄리티의 의료 서비스로 인한 치료의 지연. 앞서 언급한 장벽들을 모두 넘어서 병원에 도달했다고 해도 충분한 설비와 약품, 그리고 24시간 수술이 가능한 인력을 갖춘 곳은 손에 꼽습니다. 양수가 낮에만 터지는 것도 아닌데, 시골 지역으로 가면 갈수록 상시 분만이 가능한 시설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듭니다. 이처럼 모성 사망의 근본적인 원인은 의료 기술과 이론에 있지 않습니다. 모성 사망률이 높은 곳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들은 모두 사회적 구조와 시스템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임신 관련 질병으로 사망하는 대부분의 여성은 빈곤과 차별을 경험해왔던 사람들입니다. 소득 수준이 낮을수록, 교육 수준이 낮을수록, 카스트가 낮을수록, 그리고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 지역에 살수록 모성 사망률이 높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소녀들과 여성들은 종종 자신이 앞으로 어떤 교육을 받고 싶은지,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은지, 누구와 결혼을 하고 싶은지, 언제 성관계를 맺고 싶은지에 대해 강요된 선택지 속에서 제한적인 선택을 해야만합니다. 더 나아가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면서 어떤 케어를 받고 싶은지에 대해 본인이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년 수천명의 여성과 소녀들이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도와야할지 모르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여성의 목숨이 귀하게 여겨지지 않고, 사회가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며, 그들이 가정과 사회에서 차별받고 배제되어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성의 생명과 자유가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앞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할까요. 제 앞에서 웃음짓는 아이들이 결혼과 출산을 스스로의 의지로 고민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미래를 위해서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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