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3년 차 육아 1년 차
나는 오랫동안 뚜벅이 여행자였다. 전국일주나 세계일주를 할 때 내가 운전을 직접 한 적이 없었다. 뚜벅뚜벅 걸은 곳, 자전거로 바람을 느낀 곳, 자동차를 타고 창가로 지나간 것, 비행기로 스친 곳마다 내가 있던 질량이 다름도 알게 되었다. 여행을 하며 발걸음의 무게도 알게 되었다고 말했었다. 여행은 매일 다니는 출퇴근 길이나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발길이 움직이는 동네가 아니기 때문에, 여행의 새로움은 어떻게 온몸으로 받는가에 따라 그 강도도 달라지게 된다. 나는 그런 여행을 좋아했다. 다만, 뚜벅이 여행은 지도를 보며 차로 가면 금방 이동할 곳을 굳이 대중교통을 타다 보니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그것을 기다림의 시간이라고도 위안을 삼았고 함께 하는 사람과 손을 잡을 수 있기 때문에 더 여행의 깊이가 있다고 단정해 왔다. 뚜벅이의 생활을 결혼 13년 차에도 묵묵히 지낸 아내도 보통 사람은 아니다. 처제는 요즘 아내와 나의 주말 드라이빙에 대한 소식에 '이제야 사람 사는 것 같네'라고 했단다.
그러다 나는 아이를 낳게 되자 급히 면허를 땄다. 지인은 이제야 나에게 사람이 돼간다고 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두 달이 지났을 때 운전면허를 땄고 아이가 여섯 달이 되었을 때 중고차를 샀다. 운전 연수를 4회 정도 하고 몇 번 혼자 동네에서 자주 가던 학교를 갔고, 학교를 가서 주차 연습을 했다. 혼자 집에서 자유로를 타려고 내부순환로를 타다 강변북로 진입에 실패해서 몇 번이고 한강 다리를 오가면서 여의도와 마포를 빙빙 돌았다. 그러고 나서야 조금씩 익숙해진다. 운전 연수 때 강사님이 홍제동에 가까운 이케아와 고양 스타필드를 일러줬다. 굳이 이런 곳을 가려나 싶었는데, 나도 별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처음 간 곳은 금요일 저녁의 스타필드였다. 카시트를 뒷 좌석에 연결하고 아내는 아이 옆에 앉았다. 출발할 때부터 긴장이 된다. 음악도 틀지 않고 잔뜩 긴장해서 운전을 한다. 다행히 운전은 성공적이었다. 오래된 아파트의 주차장은 좁고 여유가 없다. 요즘 아파트의 지하주차장이 아니라서 굴곡이 있다. 새로 만든 쇼핑몰의 주차장은 운전 연습에 유용하다.
그다음 주에 아내와 함께 단풍이 깃든 학교에 갔다. 학위 논문으로 괴롭던 작년, 은행잎에 노란색이 물들 때 논문 막바지의 대학원생으로서 단풍잎 보기가 버거웠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산길을 걸으며 마음을 다잡던 때, 논문 준비가 되지 않은 만큼 가을의 빛깔은 나에게 냉혹하게 다가왔었다. 일 년이 지난 올 가을, 은행잎을 보러 차를 타고 아내와 아이가 함께 왔고, 남다른 가을 색을 볼 수 있었다. 나무는 그대로인데 나는 변했다. 물론 나오는 길에 플라스틱으로 된 주차 차단기에 살짝 차를 부딪히기도 했었다.
운전 범위를 점점 확장했다. 아버지의 생신에 예전 벽제 근처의 고깃집에 가려고 했다. 부모님을 차로 처음 모셨다. 생일 전주에 고깃집 근처 카페를 찾아갔다. 운이 좋게 주차도 편했고 상당히 음식도 세련되고 맛이 좋았다. 특이하게 아이를 안고 나오다가 장식용 유리잔을 깨뜨렸다. 실수가 많다. 그래도 운전 실수는 다행히 없었다. 아이는 밤 중에 나갔던 구파발 롯데몰을 제외하고 카시트에 적응한 모습이다. 그때는 어찌나 울던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지난 주말에는 파주 법원리 쪽을 찾았다. 통상 헤이리 출판단지를 사람들이 많이 찾지만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을 좋아하고, 아이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없을 시간을 찾았다. 아침 9시에 출발해 파주 쪽의 작은 수목원에 있는 파스타집에 가서 브런치를 먹고, 법원리로 이동해 자동차로 갈 수 있는 전망이 좋은 카페로 이동했다. 사실 법원리는 고등학교 때 아버지와 한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았던 시간과 겹쳐있다. 언젠가는 법원리에 아버지를 모시고 가볼까 했었다. 그 옛날의 부채를 갚는다는 나의 관점은 부모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때의 기억조차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는 참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게 싫었었고 아직도 그때는 미안한 마음이 있다. 부모에 대한 연민이 없으면 부모 자식 관계의 회복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실패와 고집으로 점점 집안에서 발언권이 없어지는 아버지는 그렇다고 행동을 바꾸지는 않았었다. 아버지는 무뚝뚝한 고3 수험생 아들을 여름 방학 때 불러내더니, 퀵서비스를 하는 오토바이를 대동해서 법원리 초계탕 집을 가자고 했다. 헬멧을 쓰고 초행길의 뙤약볕을 맞으며 법원리로 향했다. 아버지의 등 뒤에서 가끔은 손을 아버지 허리춤에 잡았다가 싫증 나서 양손을 오토바이 쇼바를 잡고 바람을 느끼기도 했다. 아마도 아버지는 어릴 때 오토바이 하나에 누나와 나, 엄마까지 4명이 함께 타서 읍내 목욕탕을 가던 추억이 행복하게 박혀있을 것이다. 물론 '행복'이라는 단어는 내 감정에 치우친 표현이기도 하다. 삶의 고됨, 배불리 챙겨주지 못함에 대한 미안함 속에 빠듯한 돈을 쪼개서 외식과 목욕탕 방문을 기획해서 '미안함'이 그가 가진 감정을 수도 있다.
4명이 목욕탕에서 주던 요구르트를 빨대로 쪼르르 마시며 웃고 있던 얼굴이 그가 가졌던 변하지 않던 장면이었겠으나, 이후 10년이 훌쩍 지난 시점에서 나는 상당히 변해있었고, 같이 있는 것이 싫었었다. 그때는 아버지가 신었던 화장실 슬리퍼의 온기도 싫던 시기였다. 아마도 그가 사회생활을 하며 그의 입맛이나 그의 지갑 사정에 가장 좋은 음식이 '법원리 초계탕'이었을 것 같다. 남자 둘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서 고개를 숙인 채 기름기가 빠진 식초물에 담긴 닭고기를 먹는다. 나는 정말 맛이 없었다. 맛없다는 표현도 하지 않고 별말 없이 식사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여름날의 햇볕에 피부는 그대로 화학반응을 해서 탔다. 그것도 싫었었다.
20년도 더 지나 그 가게에서 초계탕 2인분을 포장했다. 부모님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초계탕을 아내와 먹는다. 어그적 어그적 씹어먹는다. 백 년 가게이며 오래된 맛집이라는 법원리 초계탕에 어울리지 않는 듯한 양념이 묘하게 섞여있다. 시큼하면서도 알싸한 맛이 있고,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이 있다. 그에 덧붙여 음식은 기억을 불러낸다. 이제 더 이상 법원리 초계탕을 이야기해도 전적으로 호응하며 추억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기억 속에 복잡한 삶의 관계가 맺어져 있음을 알고 있다.
아이는 태어난 지 288일째 함께 했던 초계탕 집과 법원리 카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내가 운전하느라 겁을 잔뜩 먹었었고, 그가 초계탕 집 근처 주차장에서 엄마 젖을 먹은 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것들은 몸의 순간에 쌓여있다. 언젠가 나도 아이와 서먹해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데미안이 말했던 알에서 깨어나는 것이든, 부모를 어떤 이유에서건 엄마와 아빠가 아니라 그녀와 그라는 한 인간으로 대하는 시기이든 관계와 존재가 결국에는 타자와 타자로서 분리되는 데 있어서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그때가 조금이라도 부드러운 분리가 되기 위해서, 혹은 사랑이나 부모 마음이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고단한 삶을 다시금 지탱하고, 때론 고개를 숙이며 이익에 처자식이 있다는 궁색한 이유로 집착할 수도 있다.
중고차 뒤편에 붙어있는 초보운전 딱지가 언젠가는 사라지고 운전이 두려움이나 새로움이 아니라 지겨움의 일상으로 자리 잡으며, 아이의 칭얼댐이 부담과 짜증으로 바뀔 때가 올 것이다. 다만 나의 지루한 핑계를 아이의 존재로 정당화하지 않고, 아이도 부모에게서 기성의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멈추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삶은 때론 매일 초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