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3년 차 육아 1년 차
오늘 아이가 태어난 지 40주, 280일이 되었다. 익숙한 숫자다. 작년 더워지기 시작했던 때, 아내와 함께 시험관 시술을 받으러 갔던 그 시간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물론 280일은 통상의 임신기간을 말하며, 나는 "280일 데이스"라는 앱을 활용했기 때문에 숫자가 기억났다. 두 번의 280일, 40주를 지나고, 또 다른 40주를 보내며, 아이는 엄마와 자기를 분리하는 18개월을 맞이한다. 수정란에서 태어나 출생까지 40주, 출생에서 걸으려 안간힘을 쓰는 이때까지 40주, 그리고 자기와 타인을 불리하는데 40주가 지나면 아이는 걷고 때론 뛰며 주변의 소리를 흉내 내며 삶을 구축해 간다. 인간의 생명현상이 두렵고 떨리는 것은 아이의 모든 순간이 한 번도 새롭지 않은 적이 없기 때문이면서도 아이는 농축된 진화의 과거를 회고하듯 보내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의 삶뿐만 아니다. 아내와 남편은 아빠가 엄마가 되어서 어떠한 삶의 변화를 목도하며 적응해 나가고 있는가도 동시에 두렵고 떨리기 마련이다.
수정란의 작은 세포부터 다세포가 되고, 세분화된 몸의 조직이 생기고 척추가 형성되고, 어류와 양서류처럼 꼬리가 있다 사라지고 머리가 커지고 감각기관이 발달한다. 아이는 엄마 뱃속이라는 어둡지만 먹고사는데 지장 없는 환경에서 벗어나 세계라는 밝지만 먹고사는데 울음을 동반해야 하고, 옷가지나 기저귀를 걸치는 환경에서 삶을 지탱해야 한다. 누워있어도 되는 삶에서 굳이 뒤집고 기다가 앉고 뒹굴고를 반복하다 휘청거리며 선다. 벽에 기대고 의자에 기대고 매트를 짚고 올라서다 쓰러지며 운다. 그러면서도 서겠다고 안아달라며 두 팔을 엄마 아빠에게 뻗는다.
아내는 두 번의 280일을 겪으며 단세포부터 출생까지 자기 몸을 아이의 집으로 쓰다가. 바깥으로 나와 아이에게 몇 시간도 떨어질 수 없는 존재로 살아간다. 그간 입었던 옷들은 옷장에서 오랜 잠을 자고 있다. 젖을 먹이려고 단추가 배꼽까지 내려온 길고 넉넉한 원피스를 입는다. 몇 번 빨면 금세 옷이 푸석푸석해지고 색깔도 멋스럽지 않다. 다만 아이가 흘리는 이것저것을 안 보이려 파스텔톤을 하고 있다. 한 인간이 바깥의 직업인으로서 그리고 집안의 생활인이며 양육자로 살아가는 데는 경계가 흐릿함이 엿보인다. 일주일에 한두 번 집 앞 요가를 가는데도 아이에게 젖을 물리거나 음식을 챙겨줘야 하고, 친구들과 이제 한 달에 한두 번 만날 때에도 만나러 가는 시간 코 앞까지 아이를 돌본다. 지인에게 오랜만에 뮤지컬 표를 받아서 둘이 시간을 가지려 해도 돌이 갈 수 있는가, 누구를 불러야 하나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다.
280일 두 번을 겪으며 아내는 일부 인간에게 가능한 생명의 생산 기능을 해내며 가장 동물에 가까우면서도 가장 동물을 인간답게 만드는 일의 중심에 놓여있다. 아이는 항상 안간힘을 쓰며 오랜 생물학적 시간을 농축해서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경험하고 자신의 몸에 녹여낸다. 그가 똥을 살 때 얼굴을 붉히고 잠자기 싫다고 얼굴이 붉어지게 울어댄다. 집안을 전장처럼 빠르게 누비다가도 통통한 두 다리를 가끔은 개구리 자세로 가끔은 무릎 꿇고 팔 굽혀 펴기 하는 자세로 바꾸며 온 힘을 다해 몸을 움직인다. 이제는 두 팔을 번쩍 들며 걷겠다고 온몸에 힘을 가하고, 가끔이라도 힘들까 몸을 들어 올리면 활처럼 몸에 힘을 주어 자기가 하겠다는 식의 투정을 부린다.
출산과 양육, 탄생과 성장이라는 세계에서 사라질 수 없는 순간 앞에 있다. 가장 소박하다가도 온 시간을 뺏어 갈 정도 거대한 몰입감을 주며, 가장 행복하더라도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고통도 수반한다. 임신 40주, 태어나서 40주를 보내고, 또 다른 40주의 시작 앞에서, 그리고 끝나지 않은 아이와 부모의 관계 앞에서 매일 그렇게 잠이 들기 싫어하는 아이의 순간에 대한 사랑과 시작과 끝에 대한 오롯한 감각 앞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