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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모래가 만든 세계]

 나는 반도체 제조 회사를 다녔던 경험으로 반도체는 항상 '모래 퍼서 장사한다'라고 했었다. 그러면서 왜 반도체의 재료가 실리콘(규소)이 됐는지를 자주 말하고 다녔다. 그 이유는 지구에서 가장 흔한 물질인 실리콘과 산소의 결합물인 모래가 '싸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 책을 보고서는 그 말을 쉽게 내뱉을 수는 없겠다. 산업혁명을 거쳐서 정보혁명이 도래했고, 이제는 두려움과 당연함의 영역이 되어버린 정보통신기술과 인공지능기술 기반에는 반도체가 있다. 그 반도체는 첨단기술의 총아라고 하지만 적절한 순도의 모래가 없으면 제조는 불가능하다. 가장 단순하고 흔한 기반을 부가가치로 올린 근대적 문명은 때론 놀랍지만 신화적이기도 하다. 기술이 삶을 간편하게 만든다고는 하나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지 인식할 수 없다. 인간의 근육량과 지능을 점점 대체하는 것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고도 하지만 인간을 무능력하게 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 효과로써 기술이 발달하게 되면 인간이 노동에서 해방되리라 믿는 집단과 기술이 발달하면 인간이 도구가 되리라 우려하는 이들 사이에 끝나지 않는 논쟁은 발생한다. 노동마저 기술에 수렴하는 때, 그 온갖 싼 것들을 왜 싼 것인가와 과연 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물어볼 시기가 됐다. 이 책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모래'로부터 시작해서 그 시야를 깊게 제시하고 있다. 

 

 소위 '싸다'는 경제적 가치로써 효용 대비 비용이 낮다를 의미한다. 과정대비 결과물에서 얻는 것이 많다는 것도 말한다. 새롭게 제시되는 기술들은 그 과정을 생략하면서 효율성에 도달하기도 한다. 화석연료의 대체제로 제시되는 전기차는 배터리의 제작비용이나 전기로 에너지를 바꾸는 과정의 비효율을 감안하면 그렇게 효율적이지 않다. 키오스크가 인건비를 없애줬지만 그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디지털 불평등의 비용도 발생한다. 온라인 서비스의 강자가 IT 기술을 활용해 중소 온라인 서비스를 모두 빨아들이면서 고객은 편해졌다고는 하지만, 서비스 생산자들은 노동강도나 소득감소를 체감하고 있다. 


  대표적인 근대적 산물인 콘크리트, 아스팔트, 유리, 반도체, 암석 파쇄기는 모두 자연에 흔한 재료 모래를 기반으로 만들어지고, 근대적 건축, 토목, 광학, 첨단 IT, 채굴 기술 발달에 따라서 끝없이 활용되고 있다. 모래는 어디서나 흔히 쓸 수 있는 재료가 아니라 양질의 순도가 높은 모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값비싼 비용을 지불하는데 그것이 소비자와 기술 생산자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래라는 국가, 지역, 개인이 소유하는 토지와 연관된 재산권은 무한히 휘두르며, 측정할 수 없는 비용을 지불하지도 않고 모래는 남용되고 있다. 겨울이 긴 나라에서 사계절 모두 '여름'을 느끼기 위해 두바이 인공섬을 계획한다거나 녹색사업이라는 미명아래 식생에 맞지도 않는 나무를 심으며 개발근대의 도피처를 삼는다거나 과학적으로 측정되지 않으니, 모래 광산의 분진 발생을 무조건 막으려 하는 시민단체들을 반대하는 모습은 더욱이 그 비용과 비효율을 가려버린다. 

 

 동시에  '싸다'의 욕망은 한순간, 한 명으로 결정될 수 없기 때문에 만만한 일이 아니다. 기후 위기가 충분히 현현되었음에도 당면한 문제와 이익을 따지는 시대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경제와 자본이 하나의 '신'이 되어버린 현대사회 현상을 차지하더라도 모래를 활용하는 근대적 기술은 어떤 시기에도 어디에서도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책에서 제시하듯이 유리를 만드는 기술이 전 세계에 있었지만 그것이 산업화되어서 인간의 시야와 시각에 전혀 다른 욕망을 제공하게 된 것은 '서구'에서 우연히 가능했었다. 그간 아동노동, 환경오염, 생태계파괴 등의 문제를 감안하지 않은 난개발을 지속했던 서구는 이제 비서구 지방의 근대화에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다. 혹은 전 지구적 금융시스템을 활용하여 이익을 내재화하면서 손실을 외부화한다. 자신이 속한 국가에서 일정 비용을 지불하면 비서구지방의 모래를 합법적, 비합법적으로 취득하며 자연환경 파괴, 생산과정에서 불평등과 인적 피해를 등한시한다. 혹은 환경, 기후의 이름으로 서구세계의 상품 가치를 올리며 장벽을 치기도 한다. 금융시스템과 국내총생산의 상대적 우위에 있는 서구는 상품 가격을 비싸게 팔게 해 주겠다는 명목으로 비서구에게 개선된 시스템을 강요한다. 

 법적 조치가 내려지기는 하지만 많은 국가에서 서구식의 근대적 변화에 열을 올리고 있지, 개별 국가에게 다시금 인류와 환경, 개발의 방향 적절성만 따져 묻기는 어렵다. 도시에 살다가 잠시 머무는 관광지가 개발되지 않기를 원하는 욕망은 자연보호나 적정개발도 있겠으나, 이곳은 태곳적으로 남았으면 하는 자기중심적 왜곡이다. 포마이커 책상처럼 번듯하게 놓인 뻥 뚫린 아스팔트 고속도로를 유치하면 모든 경관이 동일시된다면서 그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의 개발욕망이 낡았다고 비판하는 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다. 


 동시에 에코백을 산다고 해서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없듯이 이는 정치적 사회적 큰 변화가 있지 않는 이상, 목소리를 높이는 것만으로 모래를 포함한 근대적 문명의 재고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나부터 실천하는 삶은 고귀하다. 목소리를 높여 이상을 제시하는 것도 언제나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그 구조가 무엇인지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의 근본적인 문제를 비판하며 선험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좋지만, 각 과정마다 개입하면서 세부적인 적정성, 사회적 가치, 경제적 불평등, 외부효과 등을 고려해야 한다. 선언과 자기만족적 행동만으로 사라져 가는 모래와 과정상에서의 측정되지 않는 인간이나 무한한 가치의 훼손을 관망해서는 안된다. 욕망의 무서움은 모래의 무단채취를 통한 개인 이익이 공동체의 피해로 고스란히 돌아간다는 점이다. 현재 지구 인구는 각각 콘크리트 40톤씩을 사용하고 있으며 1년에 1톤씩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자기도 모르게 늘어나는 콘크리트처럼 많은 사람들이 무분별함에 매료되지 않으려면, 비판과 감시, 그리고 개입은 절실하다. 세상이 언젠가 다 망해버렸으면 때론 좋겠지만 그것이 불평등의 세부적인 순간은 눈앞에 닥쳐있다. 


 100여 명의 인터뷰어와 1,000건의 문헌을 활용해서 글을 쓴 노력을 빌린 책으로 만나는 것은 '싸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영화 인디아나존스 주인공처럼 가끔 드러나는 서구 백인 남성의 군더더기 같은 표현들은 개선의 여지가 있기는 하나, 모래라는 근본과 보편의 산물 속에서 기술과 경제의 정치를 발견한 그 결과물은 가치가 있다. 잘게 부서진 지구의 폐허이자 순응산물인 모래가 기술과 만나 가장 견고하고 세밀한 물품을 만들어 냈다. 건실한 건축물의 부식도 작은 염분과 물 한 방울에서 시작되듯이, 측량할 수 없는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현재의 균열은 흔한 선언과 면밀한 비판 속에서 벼려질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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