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진 여행지가 아닌 곳은 생활세계이다. 오송역에 내려 미호천 근방을 10여 킬로미터 걸었다. 오송 장수마을의 표지판이 오송역에서 걸어서 10여분을 지났을 때쯤 나타났다. 마을 어귀 현대식 오송 공원에 모여있는 노년의 여성들과 마을 어귀 느티나무 그늘 아래 모여 있는 마을 노년 남성들의 모습에서 괜히 장수를 상상하게 했다.
농촌이 가진 장수의 이미지는 여전히 외부의 시선일 가능성이 높다. 장수의 의미를 구성원 모두 긍정하는가를 묻게 된다. 매년 농사가 반복되는 논의 모습과 저 멀리 공장의 굴뚝이 함께 자리한 것이 현실적인 농촌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농촌이 계속 농촌이었으면 좋겠다는 타인의 시선이 있다. 우리나라 경제 발전기에 영남을 경제 성장의 중심지로, 호남을 여전히 전통을 지키고 옛 것이 있어야 할 것 같은 곳으로 이념화했던 것에도 여전히 현지인의 목소리는 담겨있지 않다.
촌부도 여기저기 쏟아지는 영상과 소식을 들으며 논을 다 보상받아서 삐까번쩍한 아파트에서 여생을 삶았으면 좋겠다고 욕망할 수 있고, 누구에게는 환경파괴의 온상이겠지만 지역 정치세력에게는 공장이라는 고용과 조세를 발생시키는 근대적 장치를 유치하기 위한 노력이 무엇보다 선호될 수 있다. 그래서 여행지가 아닌 곳에 갔을 때 발걸음은 더욱 망설여지기도 한다. 나에게는 이국적인 혹은 목가적인 수확기를 앞둔 논의 모습이 감동적이겠으나, 붉어진 현지인들의 피부만큼 녹록지 않은 삶의 무게일 수 있다.
모든 대추가 달고 알이 굵을 수 없듯이, 가깝게 보면 벌레 먹은 열매와 이파리들, 설익었음에도 바닥에 무겁게 낙하한 열매들이 즐비하다. 논 끝에 심어둔 고추나 깻잎의 상태도 편차가 여전하다. 가까이서 보이는 관계가 돋보기를 움켜쥐고 들여다보는 것 같아 단점도 쉬 들어다는 것과 유사하다.
미호천이 나올 때까지 논을 따라 진득하게 걸었다. 발걸음은 가벼웠고, 나의 먹을 것이 아니었고 지도 애플리케이션에서도 나타나지 않은 좁은 수로를 걸으며, 가끔씩 출처를 알 수 없는 농약과 비료의 냄새가 교차하는 길을 꿋꿋이 걸으며 만만하지 않은 삶에 대한 쭉정이 같은 생각이 웃자라 났다.
이제 미호천 곁으로 왔다. 미호천은 생각만큼 멋스럽거나 여행자로서 즐길만한 곳은 아니었다. 10여 년 전 국가의 4대 강 사업에 따라 국가하천 중에 하나인 이곳에 원주민들은 쓸 생각이 없는 자전거 도로가 천변의 식생을 무시하고 자라났다. 이곳이 양재천인지 미호천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드문드문 제대로 복장을 입은 자전거 라이더들이 내 뒤에서 앞으로 시원스럽게 직진을 했고, 가끔 나처럼 반바지에 펑퍼짐한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도 천변을 무비판적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여행자로서 끝없이 펼쳐진 강변의 풀밭을 아스팔트 위에서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양면성이 있었다. 일부러 가끔 아스팔트 옆 풀이 난 땅을 밟으며 발을 달래주기도 했다.
여전히 햇볕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어떤 풍경도 하늘색과 어우러져 매직 아우어 - 사진이 제일 잘 나온다는 노을이 맺히기 직전 - 때 모습이 상당히 아름다웠다. 누구도 여행지라 찾지 않을 공간에서 겹치는 여행 동선도 없이 혼자 길을 걸으며 대부분 시간을 마스크도 끼지 않고 돌아다닐 때 느낀 외로움과 자유로움은 어둔 터널을 지나 ktx에 앉아있는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매직 아우어가 지나고 노을이 왔다. 노을은 절정처럼 눈이 부셨다. 눈 부신 햇볕을 바라보다 가끔 현기증이 나듯이, 여행지에서의 노을은 마지막 춤이면서 두려움의 회오리로 다가온다. 원래 걸으려던 목표까지 채우지 못하고 세종까지 택시를 탔다. 원래 세종에 새로 생길 것 같은 공원을 행선지로 잡았다가 저녁 8시가 넘고, 어두움이 가득해졌을 때, 세종의 시가지로 행선지를 돌렸다. 택시 기사님은 거의 이곳의 토박이라고 했는데,, 현재 개발 중인 이 공간에 어서 빨리 건물이 들어오고 발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이어나갔다. 장수와 논밭이 새겨진 땅 건너편에 붉게 솟아있는 굴뚝을 마주하며 있는 삶의 역설, 혹은 당연스러움에 대한 도시 이민자로서의 욕망을 직시하게 된 오늘 짧은 여행에 무거운 발걸음은 가볍지 않아 좋았다.
말도 안 되게 시원한 저온숙성 맥주 한잔과 요기를 했다. 세종에서 만난 지역음식이 아닌 체인점이었다. 짜글이나 기타 이 고장의 음식을 찾으려다가 택시기사님은 "됐고 먹자골목에나 내려유"라고 했다. 투썸플레이스 작은 고향처럼 다가왔다. 가장 현대화되어 있는 것 같은 중앙버스차선의 안내판에 다시금 내가 계속 잘못 생각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 느낌도 흰 거품과 하얀 얼음잔에 날려버렸다. 오송과 세종에서 16:24에 내려서 20:34에 탔다. 4시간 10분의 시간, 또 다른 현실의 일반 상대성 이론 속에 달리 흘러가는 시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중이다. 잠시의 다른 시간을 만나면 익숙한 시간을 잠시 빼낼 수 있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