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3시, 나는 집을 떠나 잠시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저녁 10시가 될 즈음에 집으로 돌아온다. 일요일 반나절 동안 나는 서울에서 어딘가로 들렀다가 온다. 하남의 스타필드, 사당동 거리, 일산 기찻길, 용산의 한강길, 강화의 수로길을 걸었다. 오늘은 조금 욕심내어 ktx를 타고 충북 청주 오송에 가기로 했다. 집이 강북이고 서울역이 가깝기 때문에 ktx오송역은 집에서 3시 넘어 나오더라도 1시간 20분이면 도착한다. 경기도 여느 곳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지금 서울 - 광명 - 오송의 행선지에서 광명역을 지나 오송으로 기차는 달려가고 있다. ktx에는 좌석에 책상도 있기 때문에, 모바일폰에 블루투스 키보드를 켜고 검은 터널 속에서 글을 남긴다.
매체의 발달은 인간이 감각하는 시공간을 변주했다. 비단 오송역이 일산만큼 가깝게 느껴진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빌렘 펄루셔가 쓴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에서 보듯이 예전에 글씨를 새기던 때에서, 글씨를 붓으로 쓰고 문자로 옮기게 되면서 인간의 사유 속도의 변화가 있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서 보듯이 기존 활자 시대의 묘사는 정말 정밀하고 혹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자세하다. 묘사를 하다가 한 챕터가 넘어갈 정도이니. 현재의 디지털 글쓰기의 시대, 그리고 책장이 아닌 디지털 화면에서 정보 연결성과 개방성이 극대화된 시기, 독자나 인간은 기다림의 시간이 줄어들었다. 내가 흔들리는 ktx에서 글을 쓰며 잠시 차창 밖으로 흐르는 9월의 빛깔을 감상하며, 주마간산으로 훑는 ktx적 공간감은 전혀 다른 형태의 글 속도를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내릴 때까지 시간 17분이 남아있다.
서울-광명-오송을 잇는 빠른 공간의 변화는 거점을 중심으로 가속화된 발전과 거점을 제외한 공간의 정지로 양극화된 시공간 변화를 이끌어낸다. 내가 앱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이곳의 공간감과 가장 땅 깊숙이 들어왔을지 모를 수많은 터널 속의 어두움에 자리한 현재 공간에 대한 무지는 감각을 지속적으로 무디게 한다. 손택이 지적했듯이 타인의 고통에 대해 수많은 이미지가 지나치고 죽음이 숫자로 보도되는 현재의 정보 환경 속에서 이미지와 숫자는 체감되지 않고 그저 흐른다. 한 번도 같은 빛깔이 없었던 9월의 녹음에, 작은 이파리 하나 만져보지 못한, 이 닫힌 이동의 시간 속에서 나는 또 다른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 외로움은 도시의 소음 속에서는 이어폰을 귀에 꽂는 행동으로 이어지지만 고요한 공간에서는 두려움 반 기대감 반으로 꽂았던 이어폰을 다시금 가방 속으로 넣게 된다. 여행지에서 만나게 되는 생경한 소리를 듣기 위해서이다. 일상은 그렇게 지루하며 반복되고, 졸다가도 기가 막히게 일할 곳이나 잠잘 곳 즈음에서 눈은 떠지는 생존 본능으로 구성되지만, 여행은 반복되지 않아 가끔 앞으로 걷다가 뒤를 바라보게 되며, 다시 오지 못할 것이라는 희소성의 감각으로 여행에 집중하고자 한다. 방금 어느 이름 모를 개천 위로 ktx가 달렸다. 철골구조 다리라는 속도를 기댈 수 있을만한 근대적 탄탄함은 그 이외에는 바라볼 수 없게 하는 근대적 뾰족한 속도감을 알려준다.
오늘 오송역에 내려 세종 공원까지 약 15km를 걸으려고 한다. 다 걸을 수 있을지, 근대적 도구로서 차를 이용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그 거리를 발자국을 꾹꾹 눌러서 걸으며 다시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드러 보려고 한다. 수많은 물과 공기의 흐름 속에서 고즈넉해진 '미호천' 곁을 걸으면서 나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현실 속에서 잠시 뭉뚝해지려고 자연에 기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