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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삼 Jan 24. 2017

노처녀가 결혼에 대는 핑계

아직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해서

예전에 장난기 많던 친구가 내게 했던 얘기가 있다. 

"여자는 말이야, 이 세 남자를 만나보면 하산해도 돼. 시시콜콜하게 누구나 만나게 되는 직장인 이런 사람 제외하고, 이 세 사람을 만나면 진짜 미련 없이 시집갈 수 있을 거란 얘기야. 우선 첫 번째는 운동선수. 힘이 좋아. 육체적으로 '난 남자다'를 외치는데, 여자한테 맹목적인 집착을 보이기도 하지. 두 번째는 인디밴드 가수. 제3세계에 존재하는 인간들 같잖아. 어디로 튈지 몰라 불안하지만, 그게 바로 묘미라고 할 수 있어. 마지막은 변호사. 지극히 이기적인 족속들이지. "

힘 있게 펼쳐져있던 그녀의 세 손가락이 모두 사라지고 꼭 쥔 주먹으로 내 눈앞에 멈춰있을 때 나는 그녀의 주먹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셋 다 만나봤는데?"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맞네...라고 그녀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런데 나는 왜 아직까지 싱글인가 동그랗게 둘러앉은 테이블 위로 침묵과 눈빛만이 오갔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때까지 난 진짜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서였다. 당시의 그녀나 나에게 남자친구란, 이렇게 말하면 좀 잔인하지만, 고작 연애라는 게임을 함께 하는 사람 정도로 봤던 것이 맞는 표현일 것 같다. 우리는 'feel'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사전 탐색의 시간도 없이 연애를 시작했고, 그저 이렇게 살다가 뜻 맞는 이와 하는 것이 결혼이라 여겼다. 


서른이 다가온다는 이유 모를 불안과 초조함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던 스물아홉 즈음, 놀랍게도 주변 친구들은 하나둘씩 빛의 속도로 결혼을 했다. 여자에게 스물아홉이란 그런 것이었나 보다. 30대가 되기 전에 결혼을 해치워버려야 하는. 그래서 서른이 되기 전에 많지도 않던 친구들의 절반 이상이 시집을 가버렸다. 그리고 실의에 빠져있던 나는 반항심으로 새로운 사람과의 짜릿한 연애를 다짐했건만, 역설적으로 그때 만난 남자친구가 나의 첫사랑이 되었다. 그는 따뜻했고, 내게 진짜 사랑을 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연인과 싸우는 법, 연인을 아껴주는 법, 매일을 함께 해도 지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그를 통해 나는 실망과 미움을 넘어서서 누군가의 품으로 돌아가 계속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사랑이라는 게 이런 건가, 긴가민가 하던 어느 날, 나는 그의 차 조수석에 앉아 말했다.

"나는 오빠를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어. 그런데 오빠랑 있으면 정말 행복한 기분이 들어. 이게 사랑인가?"

나의 고백에 그는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 기분이 무지 좋다고 답했다. 햇살이 차 안으로 쏟아졌고, 나는 얼굴이 빨개지지 않고 편안하게 웃음 지었다. 누군가 내게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몇 꼽으라면, 가장 먼저 내 머리 속에 떠오를 장면이 어쩌면 이 장면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처음 알게 된 바로 그 순간.


그토록 행복한 사랑에도 끝은 있었다. 이별 후에도 한참을 힘들어했던 두 사람이지만, 지금은 망각의 힘으로 흐릿해진 기억 덕에 점차 미화된 상대방만이 각자의 머릿속에 남아있을 것이 분명하다. 다만 한 가지 선명한 것은 나는 반드시 정말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싶다는 결심이다. 

결혼을 한 친구들은 내게 결혼하자는 사람 있을 때 눈 딱 감고 가는 게 시집이라고 말했다. 또 누구는 모두가 가장 무난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랑 하는 게 결혼이라고도 했다. 또는 돈 많으면 결혼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의 절반은 해결된다며 돈을 많이 벌던 남자친구와의 결혼을 강력하게 권유했던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난 도무지 그 주장에 동조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인생의 동반자를 마치 승용차 사는 기준으로 선택할 수는 없다. "이만하면 무난한 남자"와 결혼한다는 말이 내겐 마치 자동차를 살 때 어딜 가도 튀지 않는 회색, 검정색, 흰색 차 중에 고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디자인이나 성능을 조목조목 따지듯 남자의 조건을 따지는 것도, 착한 남자가 같이 살기 편하다는 승차감 테스트 같은 말도 내겐 너무 소화하기 힘든 말들이다. 열병 같은 사랑과 애절한 그리움을 느껴보지 않은 누군가와 한 평생을 함께 하겠노라 약속하는 것은 내 기준에 장사에 지나지 않는다. 노처녀 노총각이라는 딱지를 떼기 위해 서로를 구제해주는 동맹, 혹은 자신을 부양해줄 부자에게 입양 가는 것 같아 보이기까지 한다. 서로 잘 맞는 조건에 조금의 호감만 곁들여지면 완성되는 것이 결혼인가? 도대체 왜 모두가 그런 결혼을 권유할까? 그리고 왜 사랑 타령하는 나를 철없다고 말할까?


얼마 전, 성황리에 끝난 드라마 <도깨비>에 따르면, 인간에겐 4번의 삶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삶을 크게 하나의 인연이 관통한다. 바로 배우자다. 그러니까 한 번 엮어진 부부의 연이 무려 4번의 삶 동안 이어진다는 얘기다. 그렇게 보면, 반려자를 찾는 일이 더 무거운 인생의 문제로 느껴지지 않는가. 그런데도, 그저 돈이 많아 나를 안락하게 해줄 사람, 무난하고 착해서 나와 싸우지 않을 사람, 혹은 예쁘거나 멋진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이 사람과 400년을 살아야 한대도? 

결혼은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나이 들수록 짙어진다. 예전에 한 인생선배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왜 제게 그렇게 결혼을 권유하세요? 해보니 좋아요?" 그러자 그의 대답은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나 혼자 당하긴 억울해서야. 자신 있으면 꼭 혼자 살아. 난 자신이 없었을 뿐이야"였다. 그는 아직도 당시의 배우자와 함께 살고 있다. 행동은 말보다 강한 메시지 전달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이 내심 마음을 꾸욱 짓누르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라이프스타일의 획일화에 자신을 가둔다면, 나는 평생 행복해지지 못한다. 내 나이 서른셋에 사람들은 올해는 꼭 시집을 가라고 화이팅을 외쳐준다. 그런데 오히려 나는 근본적으로 결혼이라는 것이 과연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맞는가 자문하게 된다. 결혼을 못할 것 같아서 대는 핑계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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