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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삼 Jul 26. 2017

노처녀에게도 전화를 끊을 핑계는 있다

왜 니 얘기는 잘만 했는데, 내 얘기하려니까 니 애는 우는걸까

적절한 시작점을 찾아 올라가자면 대학시절이 되겠다. 대학 초년생, 우리는 모든 것이 서툴렀다. 친구도 나도, 우리는 갑자기 주어진 자유가 편치만은 않았다. 아직은 어른과 아이 사이였던 스무 살을 생각해보면, 어른인척 하느라 부단히도 애썼던 기억이 많이 난다. 많은 것들 중 사랑이 특히 그랬다. 이성에 비교적 늦게 눈을 뜬 나와 달리 친구들은 스무 살부터 애틋한 사랑을 했다. 수없이 눈물 쏟고 이별하고 만나고를 반복하며 술도 감당할 수 있는 이상으로 마셨다. 친구들이 술에 취해 비틀대며 누르던 번호는 언제나 나의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10시 월화수목 드라마를 챙겨보고 앉아있는, 그러니까 부르면 바로 나가 주는 친구였던 거다. 지하철역에 주저앉아 있는 친구를 부축해 집에 바래다주고, 힙한 카페에서 눈물 펑펑 쏟는 친구를 달래는 것들이 내 젊은 시절에 떠올릴 수 있는 '사랑'에 관련된 일화들이었다. 전부 다 남의 사랑으로 점철된 스무 살 언저리의 그 시절.


그 시절이 지나고, 나 또한 연애를 시작했다. 하지만 내게도 그렇게 눈물 펑펑 쏟을 만큼 진지한 사랑이 찾아오기까진 또다시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즈음, 친구들은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다. 그들이 스무 살 때 하던 술 마시고 주정 부리기 같은 것을 하기엔 이미 너무 무르익은 나이였고, 내가 이별 후 술이라도 마실라 치면, 친구들은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좋은 시절이다, 나도 애인과 이별하고 싶네, 나도 소개팅이 하고 싶네, 하는 망발을 일삼았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도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였다. 똥 같은 소개팅 후에 축축한 기분에 전화를 하면, 친구들은 미주알고주알 그걸 다 남편에게 공유했다. 몇 시간쯤 후에, 친구들은 내게 이런 총평을 들려주었다. "오빠가 너는 정말 좋은 여자인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이상한 남자친구들만 만나고, 소개팅에도 그런 남자들만 나오는지 이해가 안 된대." 퍽이나 기분이 좋아지는 얘기였다. 아니, 정말 그 말을 들을 땐 기분이 엿같았다. 그 오빠가 내 친구도 아닌데, 왜 내 얘길 다 공유하는지도 기분이 나빴지만, 부부는 무촌이라니 그렇다 치자. 그런데 둘이 앉아 나를 측은히 여기며 그걸 또 내게 들려주는 그 심리는 시간이 지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 친구 남편에 대해 내가 아는 거라곤 이름 석자뿐인데, 왜 그 모르는 남자가 내 치부까지 다 알아야 하는 걸까. 

이외에도 소개팅 후에 유부녀들이 하기 좋아하는 레퍼토리엔 [1. 나도 소개팅 하고 싶다 2. 나도 연애하고 싶다 3. 구린 남자라도 나도 소개팅 하고 싶다 4. 재밌겠다 5. 그런 거 따지고 있으니 시집을 못 가지. 대충 가] 같은 것들이 있다. 그들의 이별에 함께 눈물 쏟아주고, 소개팅남을 함께 욕해주던 내 과거 노력은 다 어디로 가고 내가 이 친구들에게 이 따위 망발이나 듣고 앉아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일쑤였다.



그리고 직장 초년 시절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나는 친구들이 부르면 어디든 갔다. 친구가 술 먹고 신촌에서 뻗어있어도 나는 한 시간을 택시를 타고 달려갔고, 야밤에 일산까지 달려가기도 몇 차례, 남편이 출장 중일 땐 신혼집에서 혼자 자기 무섭다 하여 같이 자주기도 참 자주 했다. 이 얼어죽을 관계 설정은 그렇게 쭉 유지됐다. 내가 친구의 도움이 필요할 때면 친구들에겐 언제나 남편이, 아이가, 이모님이 어쩌구저쩌구라는 핑계들이 있었다. 내가 속상한 날 술 한 잔 해주겠느냐고 물으면, 들어가야지 난 유부년데, 혹은 이모님이 안 계신 날이고 남편은 피곤해서 잔다는 이유로 퇴짜 맞기를 수차례.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편이 내 감정이 차라리 덜 상한다는 걸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나는 친구들의 편의를 봐주며 꽤 잘 지내오고 있었다. 하지만 요 근래엔 내게 다시 이렇게 힘든 날들이 올까 싶을 만큼 힘겨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지나면 별 것 아닌' 애틋한 사랑 타령도 아니었고, 온전히 삶의 무게에 관한 얘기였다. 푸념은 두 친구에게 시도해보았다. 한 번은 아이가 깬 것 같아 끊어야겠다고 매몰차게 내쳐졌고, 한 번은 남편의 귀가시간에 밀렸다. 그때 들었던 기분은 내가 우정이라는 것에 헛된 투자를 했다는 허망함이었다. 내게도 그들의 푸념을 들어줄 시간, 함께 병원에 가줄 시간, 남편의 빈자리를 채워줄 시간에 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난 연애를 할 때에도 애인과 하루, 친구와 하루씩 주말을 나누어 할애할 만큼 바보같이 우정에 투자를 했다. 


남편과 아이가 없다고 하여 친구가 시댁 욕을 몇 시간이고 늘어놓을 때 전화를 끊을 핑계 혹은 이유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노처녀에게도 얼마든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간과 에너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다만 친구니까 기꺼이 나누어준 것이다. 

예전에 한 유부녀 친구에게 이런 서운함을 토로한 적이 있었는데, 그땐 더 가관의 답이 돌아왔다. [너도 결혼해봐라. 나도 이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 친구들 중 누구도 남편에게 당당하게 내 친구가 지금 많이 힘드니 오늘 하룻밤은 당신이 아이를 좀 봐야겠다고 요구하지 못할 이는 없다. 다만 온전히 그 친구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은 것뿐이다. 그리고 언제나 친구의 남편, 이모님, 아이 스케줄과 동선까지 고려하여 약속을 잡았던 내가 느끼는 이 배신감마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채 나 혼자만의 몫으로 덩그러니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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