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의 부활
그와 나는 내가 갓 서른이 되던 해에 처음 만났다. 우연히 한 모임에서 만난 그의 첫인상은 정말 별로였다. 기혼남녀들은 몇 안 되는 미혼인 그와 나를 찍어 붙이는 데 한창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 세팅이 너무 싫어 내게 반갑다는 인사를 건네던 그에게 난 무성의한 대답만을 던져주고 그 자리를 떠났다.
두 번째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우연히 주차장에서였다. 빈자리를 찾아 기웃기웃 대던 중 낯익은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어쩐지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나도 영문을 알 수는 없었지만, 빨라지는 심박수에 힘입어 다음엔 그에게 먼저 말을 걸어보겠노라 맘을 먹었다.
하지만 그를 다시 마주치는 일은 한 달이 지나도록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날은 그를 잊었고, 또 어떤 날엔 섬광처럼 그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키가 크다거나 뒷모습이 특별히 남자답고 멋진 것도 아니었는데, 도대체 왜 그 뒷모습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을까. 결국 나는 그를 찾아 나서기로 했고, 어렵게 그가 한 워크숍에 참여하며 그 일정이 1박 2일이라는 점을 알게 됐다. 그리고 나는 열일 제쳐두고, 연고도 없이 그 워크숍 장소로 향했다. 나는 그가 궁금했고, 이번이 아니면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워크숍 장소에 도착해 나는 제일 먼저 강당을 찾아가 그를 찾았다. 방 배정표에서 그의 방 번호를 확인한 후 조용히 강당 뒤쪽에 자리를 잡고 모든 일정이 끝나고 각자 배정된 숙소로 들어가기만을 기다렸다. 한 방에는 4명 정도가 배정이 되었는데, 각 조별로 모이는 방이 지정됐다. 그 지정된 방은 자율적으로 결정이 되었기 때문에 알 턱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무작정, 복도를 오가며 시끌시끌한 방 문을 열어 그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방을 몇 개쯤 들여다보고 나오기를 반복한 끝에, 한 방에서 마침내 그를 찾았다. 내가 방에 들어서자 모두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이 여자가 여길 왜 왔을까 모두가 의아했겠지. 그 침묵을 뚫고 한 남자가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어! 왔다 왔다!"라고 너무 티 나게 외쳤다. 그 역시도 내게 호감을 가지고 친구에게 얘기를 했었다는 걸 확인했으니 물러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방을 잃었다며 얼렁뚱땅 핑계를 대며 똬리를 틀고 앉았다. 얼큰히 취한 사람들은 그냥 또 그렇게 얼렁뚱땅 내게 술잔을 쥐어주며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밤새도록 대화를 나누고 마침내 관계의 첫 발을 내디뎠다.
그와 헤어지고 한참 뒤, 한 2년쯤 지났을까, 그가 어느 날 술 취한 채 내게 전화를 했다. 우리가 어떻게 사귀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참 좋았다고 그는 반토막난 혀로 이야기했다. 그제야 나는 그에게 내막을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홀로 이유도 없이 100킬로를 달려 당신을 워크숍에 찾으러 갔으며, 몇 개의 방을 뒤진 끝에서야 당신을 찾아낸 것이었다. 그는 술이 깨고 심장이 뛴다고 정색하며 말했다. 진정, 몰랐던 눈치였다.
반대로 나는 그에게 우리가 헤어진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우리가 결혼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공존하기 어려운 가치관이기에 그렇다고 답했다. 물론 맞는 말이었다. '빅 픽처'로는 그것이 맞는데, 그 이전에 나는 그에게 따뜻함도 편안함도 느낄 수가 없었다는 데 있었다. 사귀는 동안에도 그는 내가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괜찮다'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내게 주는 그 자유가 좋았을 법도 한데, 어느 순간 나는 그것이 나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내게 하는 애정표현들 속에서도 나는 따뜻함을 느끼지 못했다. 이전의 애인들이 내게 주었던 차고 넘치던 사랑의 따뜻함을 그에게서는 도통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간혹 푸념을 하긴 했으나, 상호작용이었을까, 우리는 서로 점점 마음을 나누기는커녕 숨기게 되는 지경에 이르고 헤어졌다.
그랬던 그를 오늘 다시 만났다. 나의 감정도 많이 누그러졌고, 워낙 이성적인 그와는 어디까지나 좋은 동료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를 만나기 전부터 여러 가지 애를 썼다. 유난히 약속 시간에 예민했던 그와의 약속에 늦지 않으려고 애쓰다 더 늦어버리고 마는 사단이 사귈 당시에도 자주 일어났었다. 오늘도 나는 일찍부터 나갈 채비를 했지만,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화장에 더 신경을 쓰다 출발이 조금 늦었다. 그와의 약속 시간에 늦을까 봐 나는 평소 겁이 많아 잘 하지도 못하던 과속을 줄곧 하며 약속 장소로 달려서 단 1분 지각으로 가까스로 시간을 맞췄다. 다음은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그를 보는 순간 평소 신경 쓰지도 않았던 차의 청결상태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항상 지저분했던 나의 차를 싫어했었다. 그리고 몇 년 사이 나는 운전도 제법 늘었건만, 그를 차에 태우니 좀체 하지 않던 실수도 짧은 거리에 몇 번이나 했다. 태연한 척하는 나의 모습도, 나는 변했고 성숙했다고 그를 설득하려 애쓰는 내 모습마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조금도 없었다. 그때의 나도 늘 그의 앞에선 애쓰며 발을 동동 굴렀던 기억이 많이 난다. 몇 년 만에 다시 본 그의 앞에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나 자신을 보자니, 옛 애인이란 그저 나를 뒷걸음치게 할 뿐, 좋을 게 하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째서 항상 겪어야만 깨닫는지, 참 답답한 노릇이다만, 이제 그를 다시 만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분명 3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인데, 이전의 모습으로만 회자되는 것도, 과거의 내가 지녔던 습관들이 무섭게 돌아오는 것도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사랑받기 위해 애쓰는 내 모습은 정말 꼴 보기가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