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문제는 노동이야!!
2012년 대선을 복기해 보면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제대로 된 대선공약집을 찬찬히 살펴보고 비교하며 후보와 함께 할 미래를 가늠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당시 박근혜 후보 공약집의 내용은 거의 대선 이전에 대선참여를 예고하며 열었던 세미나 자료의 재탕이었고,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는 막판까지 후보단일화에 힘을 쏟느라 공약집에 심지어 빈칸을 두고 후보단일화 이후 발표하겠다고 까지 써 놓았을 정도였다.
말이 갖고 있는 휘발성, 토론회 등에서 상대방과 대립으로 격앙되어 정제되지 않은 언약이 아니라 정밀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검증하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해 수차례 보완한 공약집.
읽기 쉽고 찾기 쉽게 공약들을 검색 기능이 있는 PDF 파일로, 홈페이지 플래시 동영상으로 , 책자로 잘 정리해 내 놓은 공약집을 보고 싶은 개인적 욕심은 올해도 채워지지 않게 되었다.
60일의 촉박한 대선 기간, 지난 대선 못지않게 제대로 된 대선공약집을 보기는 힘들 테니 요즘은 대선후보들이 참여하는 토론회를 유심히 지켜볼 수밖에 없다.
기계적 중립성을 천명하는 비열한 언론과 헬 조선의 용암 속에서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민초들의 감정 선이 넘실대는 SNS를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시절이다 보니 내가 좀 더 품을 팔아서 다음 대통령에게 내어 줄 한 표를 가다듬고 닦아 두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선거철이 되면 신기하게도 국민들이 귀담아 듣는 사안들에 대해서는 정치인들의 입장이 하나로 합쳐진다. 정치인들은 여야에 상관없이 어느 정당에 몸을 담고 있든 간에 누구나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겠다고 약속한다.
어떨 때는 한정적인 국가예산을 핑계대고, 또 어떤 때는 재벌대기업이 갖고 있는 우리 경제 내의 위상을 걱정하며 은근슬쩍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하던 그들의 목소리는 조용히 어딘가로 숨어든다.
평등, 개혁, 공정이란 단어가 정치인들의 입을 통해 가장 많이 세상으로 나오는 때가 선거기간이 아닌가 싶다.
과거 당신의 언사와 다르다고 다그치면 마음을 고쳤먹었다고 하기도 하고, 오해가 있었다고도 하며, 어떨 땐 딱 잡아떼기도 한다.
최근 대선 후보들의 수많은 말들 중 의미 있는 정책들로 챙겨둬야 할 것과 힘주어 말하지만 인과의 과정이 어설프고 재차 검증해야 할 몇 가지 경제관련 공약들을 꼽아보면 이렇다.
첫째로 어떤 대선 후보라도 경제공약에서 빼놓으면 안 될 약속을 꼽자면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에 기반을 둔 비정규직보호 방안이다.
900만 명에 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한다는 것은 그 가족들의 삶까지 더해 본다면 대한민국 국민의 삶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인 공약과 아이디어는 뭐래도 좋다. 노동법원의 신설,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신분 불안정 수당 지급, 공공부문의 비정규직에 대한 정규직화 등 각각의 공약에 대해 토를 달아가며 비판하고 싶지 않다. 주요한 사회적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였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그러나 어떤 대선후보든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공약이 없거나 현재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인식이 안일하다면 그 후보의 사회와 경제에 대한 통찰은 허접한 수준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두 번째로 확인해야 할 것은 재벌개혁에 대한 의지라고 할 수 있다.
마을 뒷산에 살며 오랜 기간 인명을 해친 호랑이가 있다. 호랑이 목에 목줄을 걸어야 하는데 누구는 호랑이가 그리 위험하지 않고 사실은 마을을 지켜온 신수이니 계속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하고, 누구는 호랑이와 대화를 통해 차근차근 목줄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호랑이에게 마취주사를 쏴서 기절 시킨 후 목줄을 걸어야 한다는 이도 있다.
기껏 호랑이 한 마리를 앞에 둔 상황이라면 판단하기 쉬울 것이나 정경유착을 통해 몸집을 키워온 재벌이라는 괴물은 그 실제 모습이 어떤지 한눈에 보이지도 않고 누구도 제압해 보지 못했기에 어떤 방법이 제일 좋은지 구별하기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정치인들 중에는 재벌개혁이라는 화두에서 은근히 빠져나가 중소기업 육성만을 외친다던지, 단계적인 제재와 세율 인상을 점진적으로 차근차근하겠다며 술에 물탄듯 물에 술탄 듯 한 태도를 내세우는 이도 있다.
중소기업 육성에 방점을 두는 후보라도 대기업과의 불공정경쟁에 시름하는 중소기업을 위한 내수시장 내의 재벌억제책을 제시해야 한다.
법인세의 인상을 실질적인 세금감면 특혜를 없애면서 실질세율을 인상한 후에 몇%의 명목세율 인상을 강제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는 후보라면 그 기간을 명확히 정확하게 제시해야 하고 실질세율과 명목세율 인상에 대한 각각의 효과를 구체적으로 비교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제가 대통령이 되면 할 겁니다.”라는 말은 절대 선한 권력 의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배운 국민들이기에 의지는 구체적인 정책, 방법론들의 비교에 따른 취사선택과정, 정책의 입안부터 실행과정과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시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대선후보가 갖고 있는 경제상황인식의 절박함을 확인해야 한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고른 영양을 섭취하며 요양을 하는 것은 모든 병에 필요한 처방이나 그 병이 위중한 환자에게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의사라면 사람 잡을 일 아니겠는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일부 지식인과 사회운동가들 사이에서나 회자되었으나 지금은 일반인들의 대화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일반인들의 흥미분야가 사회복지와 국가시스템에 대한 전문적 식견으로 바뀌어서가 아니다.
실업, 폐업, 가계부채 등 개개인의 경제전반에 닥쳐온 위기가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키고 척박한 삶의 늪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자구책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대중이 기본소득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는 계기가 된 것이다.
모든 대선후보가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채택하라는 주문이 아니다. 자신이 기본소득이 아닌 다른 대안이 있다면 그 대안을 구체적으로 공약제시를 해야 한다.
복지지출로써 견인하는 경제성장보다 노동임금 증대를 통한 경제성장이 우선이라고 믿는 대선 후보라면 당장 6월에 있을 2018년 최저임금 결정에 대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2천 만 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소득이 갖고 있는 위력은 경제전반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불과 1년 전인 작년 총선에서 약속했던 최저임금 인상 공약이 후퇴한 원인과 해결책, 최저임금의 인상규모 등을 선명하게 내놓아야 할 것이다.
감히 국정을 쥐어서는 안 될 박근혜와 최순실의 농단에 의해 참을 수없는 모욕을 당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이런 오욕을 씻어낸 대한민국의 명예로운 미래 모습은 오랜 기간 가다듬은 국정구상과 시민의 참여를 통해 끊임없는 소통을 기반으로 꼼꼼하게 방법론을 포진시켜 놓은 공약들이 검증받고 선택되는 선거가 이어지는 대한민국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