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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Aug 19. 2020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초임 교사의 교직 일지 6

이 방학의 끝을 잡고  

2주간의 짧은 방학이 오늘로 끝이 난다.

  그간 나의 첫 학기가 얼마나 소란스러웠지, 그렇게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나를 웃게 해 준 몇몇 순간들은 대체 어떤 장면이었는지, 때때로 무척 글을 쓰고 싶었다. 정작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는 글쓰기 과제를 종종 내 주고는 했으면서, 나 스스로에게는 그런 짬을 낼 수 없었다. 어디에 힘을 주고 어디에 힘을 빼야 하는지 몰라, 온갖 비효율의 극치를 달렸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중학교 3학년들이 등교 개학을 시작한 이후, (조금 과장을 보태서 얘기하자면) 퇴근하고 나서 오롯이 쉬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오늘 하루의 수업을 밀어내고 나면 다음날 수업을 준비해야 했고, 주말이면 밀려 있는 아이들의 과제에 피드백을 하거나 수행평가를 채점하거나 다음 주 수업을 준비해야 했다. 물론 임용 시험에 매진하여 자발적으로 아무도 만나지 않았던 시절과는 내 마음이 또 달라져서, 6월 말쯤부터는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주는 사람들을 종종 보고는 했었지만, 그럴 때조차 해야 하는 일을 안고 가거나 혹은 그들을 떠나 보낸 뒤 마무리해야 할 일을 항상 머릿속에 넣어 두고 있었다.

  이런 시간을 석 달 넘게 보내다 보니 스스로 비축해 둔 기력이 쇠해 간다는 것이 느껴졌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내 부족함을 매 시간 극명하게 깨닫게 되었고, 그런 부족함을 느끼고도 아무런 준비 없이 다음 수업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뻔뻔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내가 한다는 그 '준비'라는 것이 수업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하지 못하는 무쓸모한 것인 경우도 많았으나, 그 '준비'라도 하고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최선의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내 몸을 축내서 내 마음이라도 편하게 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출판사에서 근무할 때의 내 모습을 기억하는 지인들이라면 이런 나의 행태(?)가 놀랍지 않을 것이다. 나는 종종 '그래도' 출판사에서 일하던 때와 비교하면 얼마나 살 만하냐며, (별로 건강한 방식이 아니지만) 과거의 나를 끌어와 현재의 나를 위로하고는 했다. 그런데 분명 통근 시간도 훨씬 줄었고, 아무리 내가 학교 일을 놓지 못하는 서너 달을 보냈다고는 하나 절대 근무 시간만큼은 출판사에 다닌 시절보다 적은 게 분명한데, 왜 이렇게 쉽게 피로해지고 몸에 기운이 자꾸 없어지는지 아무리 고민해도 이유를 모르겠는 것이다. 그러다 깨달았다. 그때는 스물 너덧 살이었고, 지금은 서른이 넘었다는 걸.




내 자리 하나쯤 어딘가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내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나는 방학 전까지 임용 시험 준비를 정말 거의 하나도 하지 못했다. 대체 기간제 생활과 수험 생활을 병행하신 여러 합격자 선생님들은 이 생활을 어떻게 해 내신 걸까. 존경할 따름이다.

  그래도 2학기 때에는 (학교에서의 행정 업무와 무엇보다 수업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임용 시험 공부를 조금이라도 해 보려고, 방학 기간 동안 중학교 1학년과 중학교 3학년 수업을 그리고 자유학년제로 인해 2학기 때 진행하게 될 주제선택 프로그램의 수업 자료를 닥치는(?) 대로 미리 만들어 놓았다. 동시에 너무 많이 증발된 듯한 교육학 내용과 일부 전공 개론서를 훑어 보면서 말이다.

  이렇게까지 공부를 못 하고 100일도 채 남지 않은 시험을 앞두고 있자니, 시험의 중대성에 걸맞지 않게 마음이 무척 무덤덤하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체념이 약간 섞인 자조랄까. 내 앞에 닥친 내 시험을 조금 더 잘 쳐 보겠다고(이 시험을 잘 칠 필요가 없다고 합리화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 내 앞에 눈을 빛내며 앉아 있는 140명(물론 이 중에서 일부 아이들의 눈은 수업 내내 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지만)의 아이들에게 아무런 준비 없이 설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가 엄청난 소명 의식을 지닌 교사라서가 아니다. 내가 지극히도 '나'를 위하는 이기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서른 해를 살아오며, 내가 무엇을 가장 견디지 못하고 힘들어 하는지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에 타격을 입는 인간이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어, 너는 최선을 다했어, 이런 말들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 때 나는 이상한 안정감을 얻는 것 같다. 나를 과대평가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그렇게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내가 이루어 낼 성취의 수준이 나쁜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문제는 내 스스로만큼은 속일 수 없다는 데 있다.

  어쩌면 나는 '너는 정말 할 만큼 했으니까 그만두어도 돼'라는 말을 언제라도 들을 수 있도록, 아니 언제라도 내 자신에게 해 줄 수 있도록 마음에 방어선을 쌓는지도 모르겠다. 혹시 출판사를 다녔을 때처럼 이 일도 내가 견디지 못한다면, 내가 이 직업에서도 맞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때 다시금 무너질 나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아직 완전히 교직에 자리를 잡지 못해서일까, 나는 여전히 '출판사 편집자로서의 삶에 실패한 자'라는 인식을 떨치지 못한 것 같다. 이게 내 삶을 위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놓지 못하고 있다.

  떨치지 못한다면 놓지 못한다면 별 수 있나, 안고 가야지. 그래도 이런 불안감을 안고 열심히 살다 보면, 이런 불안감마저 추억할 수 있는 날이 언젠가 오지 않을까. 내 자리 하나쯤 어딘가엔 있겠지, 하며 오늘도 내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나는 그 회색의 도시를 사랑했던가  

임용 시험을 준비하던 수험생의 신분으로 고향에 내려 와 있었던 1년 반 동안은 서울이 그리 그립지 않았던 것 같다. 어차피 곧 돌아갈 곳이겠거니 생각했던 것도 있었고, 어차피 누군가를 만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거리감을 느낄 새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는 (20대의 전부를 서울에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서 살아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그래도 얼추 잘 지낼 것 같다는 이상한 자신감을 가끔 느끼기도 했었다.

  그런데 올해, 어찌되었든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그리하여 돈을 벌고 있는 나는, 누군가를 만나도 되는 정당한 명분을 얻은 느낌이었다. 초반에야 학교 생활에 적응을 한다고 그럴 짬을 전혀 내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고 쪼개니 짬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만나야지,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 후에야 나는 내가 무엇을 서울에 두고 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만날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 지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에게, 다들 '고등학교 친구 만나면 되겠네!'라고 쉽게 얘기했지만, 그 친구들 중 나와 연이 닿아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서울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가끔 본가에 내려올 때라야 얼굴을 볼 수 있었을 뿐, 갑자기 생각 난 김에 만난다거나 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제야 나는 내가 서울에 두고 온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분명 이 근방에서 나고 자란 자녀가, 스무 살부터 나가 살았던 '타지'를 그리워하는 것을 바라보는 건 어떤 느낌일까. 엄마는 그런 내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셔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고향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 없냐고 나에게 물으셨다. 물론 그 얘기가 시발점이 되어 '서울 물 먹은' 딸과 엄마 간에 여러 얘기가 오갔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엄마는 (서울 외 다른 지역에 원서를 냈으면 1차를 붙었을) 작년 임고 결과 때문에 내가 얼마나 속상해 했는지 알고 계셨고, 그래서 더 마음 아픈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그런 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내 본가가 만약 서울이었어도 다른 지역에 자리 잡으라는 말씀을 하셨을까, 내가 20대의 모든 곳이 담겨 있는 그 도시로 돌아가고 싶은 게 왜 '욕심'을 부려야 하는 일이 되어 버린 걸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도 정말 솔직한 내 마음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서울이라는 우리나라의 최대 도시에 자리 잡고자 하는 나의 욕망이,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살지 않으려고 하는 요즘 세대의 이기적인 생각 내지 어떻게든 서울로 올라가려고 하는 허영심으로 비추어질까 봐, 잘 모르겠다는 말 뒤에 숨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는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엄마께서는 내가 말한 그 친구들을 평생 볼 것도 아니라 하셨지만, 나는 평생 볼 수 없으니 볼 수 있을 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그곳으로 가고 싶다. 어딘가로 이동하는 데 1시간이면 갈 만한 거리라고 생각하는, 그렇게 촘촘해서 때때로 답답했던 그곳이 편리했다 추억한다. 아침이면 지옥철(?)에 갇혀 무표정한 얼굴로 각자의 일터를 향해 쏟아져 나갔던, 그리하여 내가 소위 '회색 도시'라고 불렀던 그 도시의 숨 막히는 생의 열기가, 그 속도가 애틋하다. 낯선 도시에 적응하느라 동동거리며 보낸 나의 20대 시절이 녹아 있는 그곳이 그립다. 이곳을 그리워하면 안 되는 걸까.

  20대의 끝자락에 임용 시험을 준비하느라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언제나 서울이란 도시에서 내가 이방인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향이라 생각하고 돌아온 이곳에서도 나는 어느새 이방인이 되어 있는 것 같다. 한 번도 연애를 하지 않았던 그 시절로, 그래서 누군가가 옆에 있다가 사라진 그 허전함 자체를 몰랐던 그 시절로 내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적어도 나는 서울을 알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는 없을 듯하다.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 그대를 만나  

작년 서울 지역에서 뽑은 국어과 중등 교사의 수는 59명이었다. 그리고 지난주에 발표된 올해 서울 지역에서 뽑을 예정인(최종 확정된 인원 수는 아니다) 국어과 중등 교사의 수는 26명이다. 반토막이 났다. 그나마 경기도에서 작년(101명)처럼 115명이라는 기적적인 세 자릿수 T.O.를 내 주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수험생들의 상실감과 절망감이 너무 컸을 뻔했다. (참고로 T.O.가 가장 적은 대구는 1명이다!)

  학교에서 기간제 생활을 하느라 임용 시험 공부를 거의 못 한 나는, 앞에서 구구절절 늘어놓은 얘기 때문에라도 (이렇게까지 공부 못 하고 시험장에 들어가게 될 거, 가고 싶은 지역에라도 원서를 내자는 마음으로) 솔직히 서울 지역에 원서를 지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절반보다도 더 줄어든 사전 예고 인원을 보고 심경이 복잡해지는 것이다. 이럴 거였으면 작년에 경기도를 지원해서 2차 시험장까지 들어가 봤지, 하는 의미 없는 과거사를 떠올리지 않나, 경기도는 2차 진행 방식이 서울과 다른데(참고로 공립 임용 시험은 1차 필기 시험만 문제가 동일하고, 2차 실기 시험은 각 지역별로 진행 방식이 상이하다) 운 좋게 1차를 붙는다고 한들 학교 근무 때문에 준비하지도 못 할 텐데, 하는 너무 앞서 나간 걱정을 하지를 않나(사실 김칫국 한 그릇을 들이킨 것과 다름없다)……. 나도 이럴진데, 올 한 해 이 시험만을 보고 달려온 많은 수험생들의 마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런 시대라면, 이런 상황이라면, 내가 작년에 시험을 붙지 못했고 올해도 붙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국어 교사로서의 내 능력과 자질을 판단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도 괜찮을까.

  그래도 정말 다행인 것은 올해의 나에게는 내 학생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학생들은 때때로 내가 그렇게 부족하지는 않은, 어느 정도 괜찮은 선생님일 수도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해 주었다. 이 믿음은 나의 능력과 자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나를 좋게 보아 준 그 학생들 덕분에 비롯된 것이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학생들이 보내 주는 따뜻한 시선과 말 한마디가 올해의 나를 살리고 있다.

  중학교 1학년 학생 중 몇몇은 내년에 자기 반 담임을 해 주시면 안 되겠냐고, 중학교 3학년 학생 중 몇몇은 내년에 자기가 가는 고등학교로 학교를 옮겨 주면 안 되겠냐고 말했다. 중학교 3학년 중 내가 가르치는 어떤 한 반은 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자신만만해 하더니, 정말 국어 과목만큼은 남자 반 중에서 (꽤 차이 나는 평균 점수로) 1등을 했다. 중학교 1학년 중에도 중학교 3학년 중에도 "쌤, 사랑해요!"라고 말해 주는 학생이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내가 자기들에게 화를 거의 내지 않는(이라 쓰고 '내지 못하는'이라 읽는다), 그래서 조금은 만만하기도 한 젊은 여자 선생님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것 때문만이라 생각지는 않으려 한다. 나에게도 분명 교사로서의 어떤 장점이 있는 것이겠지.

  다행스럽게도 나는 나의 완벽주의적인 성격을 학생들에게 거의 강요하지 않았던 것 같고(강요하고 싶은 마음도 전혀 들지 않았지만 받아들이는 학생의 입장은 다를 수도 있으리라), 이런 성격으로 살아온 내 삶이 꽤 많이 피곤하고 때때로 힘들었기 때문인지 학생들에게는 최대한 관용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를 견지하려 노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이런 태도를 긍정적이고 우호적으로 보아 준 학생들 덕분에, 결국은 나의 태도를 바꾸지 않고도 한 학기를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내가 만약 교직을 업으로 삼아 오랜 시간 일하게 된다면,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교직 첫해에 이 아이들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나는 지금도 단언할 수 있다. 내가 너무 늦지 않게 교사로 자리를 잡아 이 시기를 추억하게 된다면, 나는 '이 아이들을 만나라고 올해와 같은 시기가 내 인생에 있었구나'라고 생각할 것도 알고 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그 수많은 학생들 중에서 나의 '첫' 제자로 와 준 이 아이들에게 나는 평생 감사하며 살아갈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나중에 이 아이들이 자라서 혹여 우리가 만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조금 더 괜찮은 선생님이 되어 있고 싶다. 조금 덜 노력하고도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보다 안정감 있고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도 이 불안정한 시기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그게 당장 내년일지 아니면 내후년일지 알 수 없지만, 그리고 그곳이 서울일지 경기일지 아니면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일지도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또 걸어가다 보면 이 길의 끝에서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낭만적인 기대를 안고 새 학기를, 임용 시험을 다시 한 번 치르게 될 추운 계절을 맞이하러 간다. 다시, 시작이다.

* 이 문장의 일부 표현 및 이 글의 제목은 가수 god의 '길'이라는 노래의 가사에서 따온 것임을 밝혀 둔다.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가수여서가 아니라, 이 곡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명곡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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