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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Aug 28. 2022

거기 있었구나, 나의 사랑 세포

그리웠던 나의 프라임 세포에게

자가 격리가 끝난 지 만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그렇다, 나는 2학기가 개학한 지 딱 3일을 버티고 코로나에 걸렸다. 그간 수많은 아이들과 동료 선생님들이 코로나에 확진되고, 격리 기간을 거쳐 돌아오는 것을 무수히 목격하면서도 어찌어찌 내 몸이 잘 버텨 주는 것을 보고, '혹시 내가 (소위 말하는) 슈퍼 항체를 가지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내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사실 코로나에 걸리기 직전, 어째 불안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여름방학 기간을 보내고 오랜만에 학교에 가서 며칠 수업을 하고 보니 피로감도 몰려오고 유독 목이 아픈 것도 같았고, 개학과 동시에 우리 반에서 몇 달만에 다시 확진자가 나오는 걸 보면서 위기감을 느꼈던 것도 같다.

     그렇지만 실상 내가 불안감을 느꼈던 가장 큰 이유는 내 몸의 면역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겠다 생각할 만큼, 2학기 개학을 앞두고 내가 너무 많이 울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울어 댔는데 몸이 괜찮을 리가 없지, 생각했을 무렵 정말로 코로나에 걸린 것이다.




몇 년 전, 내가 개인적으로 너무너무 멋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다. 내 눈에 그렇게 보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만약 이 사람과 내가 잘 된다면?'이라는 가정이나 상상을 종종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마음이 겉으로 티가 나지 않았을 리 없지만(내가 티를 안 내고 감추고 싶어 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반응이 딱히 없자, 혹여 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싶어서 (거기에 더해 내 스스로의 자존심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더는 표현하지 않고 멈추었던 그런 과거의 순간이 있었다.

     이후 나는 때때로 그 사람의 근황과 안부가 궁금했지만, 따로 연락할 용기는 내지 못했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졌었는지를 나 자신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고, 어쩐지 그 사람도 그런 내 마음을 대강 알고는 있었을 것 같아 연락하기가 민망하고 좀 찔리고(?) 그랬던 것이다.

     그러다 이번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 어떤 계기가 생겼고 나는 그것을 핑계로 그 사람에게 연락을 했다. 사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연락할 명분이 생기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던 것도 같다. 여하튼 그렇게 시작된 오랜만의 연락을 기점으로, 어찌어찌하다 보니 여름방학 내내 그 사람과 연락을 하며 서로를 (남자 대 여자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꿈만 같은 비현실적인 시간이었다.

     동시에 그 사람을 향한 나의 감정이 (과거에 완전히 매듭지어진 것이 아니라) 그저 봉인되어 있었을 뿐임을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주 찰나의 계기만으로도 고이 간직되고 있었던 마음의 불씨는 이내 타올랐다. 과거의 내가 그에게 지녔었던 호감과 그 시절 내가 키워 갔던 그에 대한 환상, 현재의 내가 지니게 된 그에 대한 애정과 믿기지 않는 최근의 관계가 만들어 낸 희열 등등… 다양한 감정이 얽히고설켜, 솔직히 고백하자면 여름방학 내내 나는 평상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머릿속 한구석에는 항상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들어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는 그 사람과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다. 그 사람과의 관계를 이번에는 정말로 완전히 매듭지은 것이다. 구체적인 이유를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어느 정도 거리에서는 너무나도 좋은 사람 혹은 그리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던 누군가가, 적어도 '나'라는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는 좋지 않은 사람이 될 '수도' 있음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 사람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알아 갔던 근 한 달의 시간은 그래서, '나'라는 사람이 무엇을 견딜 수 있고 무엇을 견딜 수 없는지를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동시에 내가 너무너무 멋있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이, '나'라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는 그러한 존재로만 남을 수는 없음을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다. 물론 나 역시 그 사람에게 그랬을 것이다.

     지금이야 이렇게 덤덤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나는 전혀 괜찮지 않은 여름방학을 보냈다.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혼자 있을 때 오열을 하지 않나(물론 원체 내가 평소에 잘 우는 사람이기는 하다), 그러고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을 때에는 친한 지인들에게 통화 좀 해 줄 수 있냐고 부탁까지 하게 되지를 않나(기꺼이 내 부탁을 들어준 소중한 사람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을 전해 본다), 그렇게나 상처받았으면서도 끝끝내 조금 더 버텨 보려고 애쓰지를 않나. 돌이켜 보니 그 사람과 함께한 한 달의 시간 동안 가장 비현실적이었던 것은, 20대 시절에 두고 왔다고 생각한 과거의 내 모습과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는 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는,
20대 시절에나 목도할 수 있었던 과거의 나와 다시 조우한 셈이다.




     이런 바보 같고 미련스러운 모습은 과거의 그 시절에 묻어 놓고 왔다고, 이제는 그 모습으로부터 졸업했다고 당당히 얘기하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그런데 나는 과거의 나로부터 별반 달라지지 않은 현재의 내 모습을 발견하고도 그리 싫지 않았다. 사실 싫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나는 이상한 반가움과 안도감마저 느꼈다. 어떤 사람 때문에 아직까지 그렇게 울고 웃을 수 있는 나를 보고, '나 아직 살아 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사람 때문에 온갖 감정의 풍파를 겪고는 했던 내 모습을 가엾어 했으면서도, 동시에 그런 내 모습을 아끼고 사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아파하는 모습을 다시금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설레고, 누군가 덕분에 웃고 행복해 하는 내 모습을 (내 생각보다 더 많이 더 오래도록) 기다려 왔던 것이다. 설령 높은 확률로 이번처럼 울게 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결국 그 사람과 잘 되지 못했다는 결과만을 가지고 내 스스로가 상처받지 않도록, 나를 지켜 주려고 한다. 어쩌다 이번에도 이런 사람과 엮였냐는 결과론적인 얘기는 당연히 나에게 쓰라림과 씁쓸함을 선물하지만, 그런 감정들이 나의 자존감을 갉아 먹게 놓아 두지는 않으려 하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내 자존감은 '나에게 얼마나 잘해 주는 사람을 만났는지' 혹은 '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을 만났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누군가가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판단이 섰을 때, 그때 (내 자신을 지키고 스스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을 다하기 위해서) '나'를 위한 선택을 내릴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나 또는 타인이 '왜 그런 사람인지' 혹은 '그런 사람이지 않을 수는 없는지'와 같이 내 손을 떠나 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물론 이런 부분을 미리 알아차리는 혜안을 가진 사람들도 분명 많은 듯하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와의 관계를 위해 눈에 보이는 것들도 보이지 않는 척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큰 사람이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삼십 년이 넘는 시간을 '나'와 함께 '나'라는 사람과 살아오면서, 내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마련한 지독한 방어기제이자 지극히 편파적인 애정의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자가 격리 기간 동안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함께 추스르며 아이들과의 재회를 준비했다. 나에게는 챙겨야 할 스물네 명의 아이들이 있고, 더 이상 그 사람 때문에 힘들어 하기에는 우리에게 남은 2학기가 너무 짧다.

     나는 이번에도 많이 아팠지만, 이번에도 나를 위해 행동하는 저력(?)을 보였으므로 괜찮다. 내 나름대로는 할 만큼 했다 싶어서인지, 최후의 최후까지 견뎌 보려고 애썼기 때문인지, 미련도 후회도 없다.

     그러므로 남은 올 한 해의 시간 중에 우연처럼 운명처럼 누군가와 인연이 맞닿을 기회가 또다시 나에게 주어진다면, 나는 그 결말이 불확실하다고 해도, 그래서 나에게 또 한 번의 아픔으로 남을 수 있다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들 수 있을 것 같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국 나는 '나'를 지켜 낼 것임을 알고 있으므로.

     격리 기간 중 다 읽은 『건너오다』라는 '다큐 피디 김현우의 출장 산문집'* 243쪽에는 이런 구절이 실려 있다.

어떤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그가 바라는 것, 가지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가 차마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보통 위기의 순간에 그것은 밝혀진다. (…) 모든 것을 지킬 수는 없을 때,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을 때 개인이 내리는 선택, 그렇게 희생을 감수하고 지켜낸 것이 그 개인을 규정한다. 그리고 그런 결정 후에 종종 개인은 자신이 어떤 경계를 넘어와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직업을 바꾸고 그 과정에서 불확실성을 감내해야만 했던 몇 년간의 수험 생활 속에서도 차마 내가 버리지 못하고 끝끝내 잃고 싶지 않았던 것들 중에는 분명, 누군가를 내 마음에 담는 것, 그 과정에서 무수히 울게 되더라도 내 마음에 후회가 남지 않게 최선을 다하는 것, (분명 겁은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겁먹지 않고 뛰어드는 내 모습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여름방학 때 그렇게 아팠으면서도, 아파하는 내 모습이 이상하게 반갑기도 했던 것이다.

     한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그 사람과 나와의 인연은 끝이 났지만, 나는 잃어버린 줄 알았던 (나의 '프라임 세포'** 중 하나인) '사랑 세포'가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니 꽤 괜찮은 여름방학이었는지도.

사랑아, 너 거기 있었구나.
오랜만이야!
* '따옴표' 안의 내용은『건너오다』라는 책의 부제를 그대로 옮겨 온 것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언젠가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 이동건 작가님의 웹툰(이자 나의 인생 웹툰인) 『유미의 세포들』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어떤 한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세포들 중 가장 강력한 세포를 '프라임 세포'라고 부르며, 사람마다 각자의 프라임 세포는 다르다. 참고로 나는 내 프라임 세포가 '사랑 세포, 감성 세포, 작가 세포'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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