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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Aug 10. 2024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

[필리핀 보홀 여행기] 3부. 프린이와 바다, 그 후

읽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캐리어에 고이 넣어서

필리핀 보홀로 떠나기 전날까지 내가 어떤 일을 마무리하느라 허덕였다는 사실을 스리슬쩍 언급한 적이 있다. 실은 그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나는 우연히 한 권의 책을 알게 되었다. 어딘가 보정을 해 놓은 듯 오묘하게 아름다운 연보랏빛 하늘과 그것보다는 조금 더 짙은, 보라색처럼 보이는 활주로가 둘러싸고 있는 공항의 모습이 표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책. 자세히 보면 표지 상단에 이륙하는 비행기의 모습이 아주 미세하게 구름과도 같이 그려져 있는 책. 김민섭 작가의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라는 에세이집이었다.

김민섭(2021),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 창비교육.

   나는 여전히 표지의 사진이 어떤 공항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아무렴 어떤가. 곧 인천국제공항으로 가서 필리핀 보홀로의 여행을 앞두고 있었던 그 무렵의 나에게는, 이 책이 나에게 온 것마저 일종의 필연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캐리어의 공간이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보홀에 가서 이 책을 읽겠다며 굳이 굳이 챙겨 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들 예상하셨듯이 본문 한 쪽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그대로 다시 들고 왔다. (프롤로그 부분만큼은 여행지에서 읽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이러나저러나 책을 읽지 못한(않은) 것은 매한가지이다.)

   어찌되었든 그러한 상황 속에서, 나는 결국 이 책을 보홀에서의 여행이 끝난 뒤 집에 돌아와서야 읽게 된 것이다.

* 이 글의 제목도 김민섭 작가의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에서 빌려 온 것임을 밝혀 둔다.




내 몸에는 물의 감촉을, 내 마음에는 사람의 온기를

필리핀 보홀에서 보냈던 시간이 그간의 여러 여행들보다 특히 인상적으로 남았던 것에는,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내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한 바다라는 대자연을 최초로 접해 볼 수 있었던 기회의 장이었다는 이유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기실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바닷속에서 보낸 시간이 내 기억 속에 환상적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바다로 가기까지 그리고 바닷속에서 무사히 물 밖으로 나오기까지 운 좋게도 여러 좋은 사람들의 호의와 배려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여행이 끝나고 나서도, 아니 여행 중간중간에도 나는 때때로 조금 전 있었던 필리핀 사람들과의 일화를 떠올리며 어쩐지 따스하고도 뭉클한 감정을 느끼고는 했다. 내가 골랐던 첫 이틀의 숙소에서 우리의 아침 식사부터 퇴실 시의 상황까지 챙겨 주었던 직원분(이후 우리의 일정을 들으시고는 현지인의 입장에서 더 나은 곳을 추천해 주기도 하셨고, 툭툭이라고 부르는 필리핀 현지의 교통편을 이용하는 과정에서는 가격 흥정(?)까지도 도와주셨다), 나팔링 스노쿨링에서 우리를 챙겨 주시고 어설픈 잠수 동작일지라도 시도해 볼 수 있도록 격려하고 지켜봐 주셨던 가이드님, 발리카삭 투어에서 우리에게 더 풍성한 바닷속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동분서주하시면서 결국은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여 (일종의 사기라고 느껴질 만큼) 예술 같은 사진까지 남겨 주셨던 가이드님 등등…….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작별을 고한 다음, 나도 모르게 한 번 더 뒤를 돌아보게 만든 분들이 참 많았다. 나란 사람의 눈에는 나팔링 스노쿨링에서 가이드님의 오리발(핀)이 물속에서 몇 번씩이나 벗겨져 다시 신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발리카삭 투어에서의 가이드님이 바닷속 어떤 생물에게 팔을 쏘이신 것인지 계속 위팔 쪽을 계속 만지시던 모습이 너무나 잘 보이는 것을 어떡하는가.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 대해(혹은 그러한 프로다움에 대해) 제대로 감사를 표하기에는 내 영어 실력이 부족했고, 그렇다고 부족한 부분을 몸짓 등으로 메꾸기에는 내 성격이 너무 소심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팁(tip)을 주는 필리핀의 문화를 통해서라도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듯하다. 이미 보홀에 한 번 와 본 적 있었던 나의 버디가, 일반적인 수준보다 과한 팁을 드리게 될 경우 다른 관광객들에게 의도치 않은 민폐가 될 수도 있다는 등의 여러 이야기를 해 주어서, 그 점을 신경 쓰면서도 적정 선 안에서는 가급적 많은 팁을 드리고 싶었던 게 사실이었다. 나의 버디 또한 이러한 나의 마음을 흔쾌히 이해하고 공감해 주어서, 우리는 발리카삭 투어가 끝나고 나서 (정신이 없는 바람에 가이드님께 마음만큼 팁을 제대로 드리지 못한 상황이었다) 업체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계좌이체로 추가 팁을 드리기까지 했다.




좁은 방에서 넓디넓은 바다를 그리워하며, 부디 당신이

그러나 그렇게 돈으로나마 내 마음을 표현해 놓고 나서, 돈으로 마음을 표현한 것이 약간은 찝찝하고 조금은 내내 불편한 것이다. 혹여 돈으로 유세를 떤 것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염려하다가, 그러한 생각 자체가 너무 오만한 것은 아닌지 반성하다가, 정말로 내가 돈으로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마음을 사려 한 것은 아니겠지 성찰하다가……. 그러다 보홀에서의 여행이 끝난 뒤 집에 돌아와서 김민섭 작가의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를 읽게 된 것이다.

   나는 우리가 드린 팁이 그분들에게 그날 하루의 소소한 즐거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자신의 일을 열심히 수행한 것에 대해, 그 노동의 가치를 받는 사람도 모르지는 않는구나 생각하시면 좋겠다 싶었다. 더 나아가서는 누군가의 가족일 그들이, 조금은 더 가뿐하고 신나는 표정으로 귀가하실 수 있기를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우리의 소소한 팁이 그 정도의 기여는 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마음의 정체를, 마음의 근원을 어렴풋하게나마 규명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다음번에 조금 더 후련한 마음으로 보홀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라는 책이 이에 대한 나름의 답을 준 것이다. 사실 책장을 오래 넘길 필요도 없었다. 책의 제목부터가 나에게 모든 것을 시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필리핀 보홀에서 나와 연이 닿았던 사람들이 잘되기를, 그들이 살아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제야 여행 오래도록 이어지던 생각의 굴레에서 나는 해방될 수 있었고, 이 이유를 제외하고서라도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를 읽으며 나는 몇 번이나 울컥할 뻔했다. 슬퍼서가 아니라 희망적이라서, 가여워서가 아니라 따스해서 울컥했다.

   필리핀 보홀로의 짧은 여행을 마무리하는 글이 서평처럼 느껴질 수 있는 이런 글이 될지는 나도 미처 몰랐다. 그러나 그 유형을 따지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이 책을 알게 된 것이 일종의 필연처럼 느껴졌다면, 여행을 다녀온 후에는 정말이지 운명이라 확신하게 되어 버린 것을. 나에게 있어 2024년 여름의 필리핀 보홀 여행과 김민섭 작가의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라는 책은, 앞으로도 함께 떠오르고 그래서 더더욱 깊은 여운을 남기게 될 터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고 있을 당신은 선한 존재라고 믿는다. 그대 고운 사람, 무해한 존재로서 타인과 이 세계와 만나고자 하는 당신의 선한 길은 잘못되지 않았으니까, 계속 그 길을 걸을 수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 꼭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최근 몇 년간 내가 가장 많이 해 온 한마디를 당신에게 보낸다.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잘됨이 나와 우리의 잘됨이 될 것이다.

- 김민섭 작가의『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 271쪽, 에필로그 중에서

   선한 존재, 고운 사람, 무해한 존재로서 살아가고 싶다. 가끔씩 마음이 너무나도 옹졸해질 때는 바다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그러다 필리핀 보홀에 계시는 그분들도, 필리핀 보홀의 넓디넓은 바닷속 거북옹도, 언젠가는 김민섭 작가님도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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