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보홀 여행기] 2부. 당신의 바다에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1일차. 물 밖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제발 빠른 속도로 멈추어 줄 수 없겠냐는 나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나의 신체 기관들은 여느 때처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여지없이 수행했다. 그 말인즉슨 나는 보홀에서 제대로 맞이한 첫날에도 여전히 생리 중이었다는 뜻이다. 물속에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불행 중 다행으로 그날 우리가 계획해 둔 일정은 '스쿠버다이빙(수중 호흡기를 지니고 잠수하여 체력을 단련하는 수중 스포츠)' 체험뿐이었고, 나는 (프리다이빙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갔던 것에 반하여) 이상하게 스쿠버다이빙에는 관심이 덜했다. 경험의 기회가 주어진다면야 한 번쯤 체험해 보고 싶었지만, 그 기회를 놓친다고 해도 크게 미련이 남지는 않을 듯한 딱 그 정도의 마음이랄까. 몸 상태로 인해 도전해 볼 수도 없는 사람의 합리화일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별다른 아쉬움 없이 버디 홀로 바닷속에 들어가는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이미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나의 버디는, 오랜만의 스쿠버다이빙이라 조금은 어색한 듯 보였다가도 이내 이런저런 장비를 능숙하게 착용하고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스쿠버다이빙 업체의 배려로 (별도의 비용 지불 없이) 배에 타 있을 수 있었던 나는, 그 모습을 핸드폰으로 열심히 찍어 두었다.
스쿠버다이버들이 다시 올라올 때까지 배에 타 있는 직원들은 저마다의 위치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따금 일렁이는 잔잔한 파도의 움직임을 느끼며 그렇게 그저 머물러 있었다. 푸른빛으로 가득한 사방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하고 평온해졌다.
수면 위에서도 바다에 대한 애정이 이렇게 충만해지는데, 수면 아래에서는 얼마나 더할까 생각하던 찰나, 스쿠버다이빙을 마친 버디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약간 상기된 버디의 표정을 보고 나는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은 어떻게든 바다에 들어가야겠다고!
2일차. 물 밖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만, 바다란 이런 곳이였군요!
나의 절박한 마음을 읽어서일까, 나의 신체 기관들은 뒤늦게 빠른 속도로 자신들의 할 일을 마무리해 나갔다. 보홀에서의 둘째 날, 나는 아무런 준비물(?) 없이 바다에 들어가도 괜찮을 정도가 되어서 예정대로 '나팔링 포인트(정어리떼와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할 수 있는 스노클링 포인트)'에서 스노클링을 하러 갔다. 나팔링 포인트로 이동하여 입장료와 구명조끼 대여료 등을 지불하고, 물속에서 우리의 안내자이자 보호자가 되어 줄 현지 가이드님을 기다렸다. 이른 오전 시간부터 사람들(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적어도 95퍼센트 이상은 한국인인 것처럼 보였다)이 너무 많아서, 우리는 4인 가족으로 구성된 팀에 붙어 이동했다. 한국에서부터 고이 챙겨 온 오리발을 물가에서 신는데, 내 발에 닿는 물이 수영장 물이 아닌 바닷물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다. 설레는 긴장감이 내 몸을 휘감았다.
첨벙, 구명조끼를 믿고 드디어 바다에 몸을 던졌다. 여기가 프리다이빙을 연습하던 수영장이라 생각하고 스노클로 공기를 들이마시는데, 평소처럼 호흡이 되는 것이다. 그 순간 혹시나 싶었던 불안감은 가뿐하게 증발하고, 나는 마스크를 통해 처음으로 바닷속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수심이 얕아서 모래(가 맞는진 모르겠다)가 깔려 있는 바닥이 보였고 산호며 이름 모르는 물고기며, 내가 동화책 속에서나 보았던 바닷속 장면들이 눈앞에 쭉 펼쳐져 있었다. 정말이지 내가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이었다!
4인 가족을 데리고 먼저 이동하신 가이드님을 뒤따라 버디와 함께 이동하는데, 그래도 프리다이빙을 조금이나마 배웠다고 둘 다 큰 무리 없이 조금 더 바다의 안쪽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 이르자 수심이 확 깊어지면서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해의 경계가 나타났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함이라는 것을 물리적으로 처음 체감한 순간이었다. 짙은 남색이 끝없이 이어진 바다의 진면목을 나의 얄팍한 표현력으로는 감히 묘사할 수 없다. 너무나도 심오하고 아득한 깊이 앞에서 나는 그저 막막함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느낄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내 마음속에서는 저 심해로 나가 보고 싶다, 저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는 바람이 불현듯 차올랐다. 능력이 부족하여 바닥이 보이는 얕은 바다와 심해의 경계 사이를 왔다 갔다 해 보는 것만으로 이번에는 만족했지만, 나는 끝없는 바다가 무섭기보다 궁금했다.
어쩌면 이것이 프리다이빙을 배우는 과정에서 나의 장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적인 생각을 하며 조금 더 움직이던 와중에, 무서울 정도의 엄청난 정어리떼가 바닷속에서 이리저리로 이동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물고기가 떼를 지어서 다니는 것인지, 장관도 이런 장관이 없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더 깊은 곳에서 스쿠버다이빙으로 정어리떼를 바라보는 무리도 있었고, 능숙하게 정어리떼를 가르며 바닷속으로 다이빙해 가는 사람도 보였다. 나와 버디도 정어리떼와 함께 유영하고 싶어서 조심조심 구명조끼를 벗고 어설픈 다이빙 동작으로 바닷속에 들어가려 시도해 보았으나, 부력이 강한 바다에서 우리의 실력은 택도 없없다. 그렇게 나의 첫 바다 경험은 프리다이빙 실력을 더 키워야겠다는 강한 다짐을 마음속에 남긴 채 마무리되었다. 바다라는 대자연 앞에 완전히 매혹된 채로 말이다.
3일차. 바다거북의 날갯짓을 보셨습니까?
어느덧 보홀에서의 마지막 하루가 되었고, 나와 버디는 이 하루를 새벽부터 알차게 시작하기로 하였다. '고래상어'와 '발리카삭' 투어를 한꺼번에 진행하기로 한 날이어서, 우리는 새벽 5시 30분에 숙소에서 출발했다. 고래상어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이른 오전의 제한된 시간뿐이라고 해서 일찍부터 움직였는데, 이날은 파도가 심하고 바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우리보다 더 일찍 바다로 출발한 분들의 배가 뒤집히는 사고까지 발생하면서, 우리는 (그리고 그날 우리와 한 팀이었던 다른 두 분도) 미련 없이 고래상어 투어를 포기하고 바로 발리카삭 투어로 넘어갔다.
우리 둘과 다른 두 분까지, 총 네 명을 위해 가이드 두 분 그리고 배를 조정하고 운행에 도움을 주실 (진행 요원 격의) 두 분이 함께 배 한 척에 올랐다. 어제 갔었던 나팔링 포인트가 바닷가 근방에서 이루어진 체험이었다면, 발리카삭 투어는 배를 타고 한참을 바다로 나가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진정한 바다를 만나게 되는 느낌이다.
조금은 시끄러운 배의 모터 소리와 함께 바다를 가로질러 나아가는데, 투명하고 청명한 바닷물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복잡했던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어느덧 모터 소리가 멈추고, 가이드님이 물고기 포인트에 도착했다고 알려 주셨다. 어쩌다 보니 우리가 프리다이빙 레벨 1 자격이 있기는 하다고 가이드님께 말씀드려서일까, 당연히 구명조끼를 챙겨 입으려는 우리에게 가이드님이 바다의 깊이가 깊지 않다고 그냥 들어와 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다. 나와 버디 모두 무슨 생각이었는지, 겁도 없이 구명조끼를 입지 않고 바다 한가운데에 몸을 던졌다. 짜디짠 바닷물은 구명조끼를 입지 않은 우리도 둥둥 띄워 주었다.
수(水)속성 인간임이 분명해 보이는 가이드님들이 능숙한 실력으로 잠수를 하시더니, 물고기들을 불러 모으는 먹이를 적당히 흩뿌려서 우리 쪽으로 물고기들을 유인해 주셨다.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에서 본 듯한 물고기들이 내 눈앞에서 이리저리 헤엄쳐 다니는데, 이런 광경이 실재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그러한 장면 앞에서 나라는 인간은 정말이지 한낱 미물에 불과해 보였고, 바다 밖에서 내가 끌어안고 있었던 무수한 고민과 잡념도 크게 연연할 필요없는 사소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 듯 느껴졌다. 내 온몸을 떠받치고 있는 바닷물과,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바닷속 광경 덕분에 감지할 수 있었던 깨달음이 아니었을까.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간 물고기 포인트에서의 스노쿨링을 마치고(여기서도 우리는 프리다이빙에서 배웠던 덕다이빙을 시도해 보았으나, 가이드님께서 아래로 밀어 넣어 주셨던 찰나의 순간을 제외하고는 바닷속으로 제대로 들어가지 못했다), 다시 배를 타고 거북이(정확하게는 바다거북) 포인트로 이동했다. 말 그대로 거북이를 많이 볼 수 있는 지점이라는 뜻이었는데, 솔직히 배 위에서 준비할 때만 해도 정말로 이 바닷속에 거북이가 있을지 믿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물고기 포인트에 비하여 파도가 높고 물속에서의 시야가 잘 확보되지 않아서, 정말로 거북이를 볼 수 있는 것일까 의구심이 피어오를 무렵, 가이드님이 손짓으로 한곳을 계속 가리키시는 것이다. 그쪽을 향해 열심히 헤엄쳐서 다가가 보니, 정말로 바닥에 거북이 한 마리가 느릿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수면 위에 떠 있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먼 거북이였기에, 또다시 가이드님께서 우리를 위해 출격하셨다. 능숙하게 바닷속으로 잠수하신 가이드님이, 거북이가 기어다니고 있는 바닥의 모래와 풀(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거북이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한다)을 긁어모아 올라오셨다. 그리고 수면에 가까운 높이에서 손을 슬며시 풀어 그것들을 슬슬 흩뿌리자, 어느 순간 바닥에 있던 바다거북이 날갯짓(?)을 하며 사선으로 서서히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바다거북을 향해 있는 힘껏 다가가다 보니, 바다거북이 수면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입을 뻐끔거리며 숨을 들이마시는 찰나의 순간을, '오늘은 너희가 나의 바다에 와서 감탄하고 가는 인간이냐?' 하는 듯한 초연하기 그지없는 그 눈빛을 나는 분명히 목격했다. (나만의 착각일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바다거북과 눈이 마주친 그 순간의 울컥함이 지금도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어쩌면 내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가 한동안은 쉽사리 프리다이빙을 포기하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다시 한 번 이 바다에 와서, 바다거북이 오르내리는 그 속도와 각도에 맞추어 잠수를 하고 그 옆에서 나란히 잠영해 보고 싶다는 목표가 생겨 버렸기 때문이다. 정말로 나의 프리다이빙 실력이 그 정도로 향상되는 날이 오면, 바다거북에게 방해되지 않을 만큼, 바닷속 수많은 생물들에게 실례가 되지 않을 만큼, 딱 그만큼만 그들의 바다에서 함께 어울리고 싶다.
거북이 포인트에서의 스노쿨링이 모두 끝난 뒤 배에 오르는 과정에서 무릎을 크게 박았다 싶었더니만, 500원짜리 동전 크기의 시뻘건 피멍이 생겼다. 색깔도 너무 튀고 누르면 너무 아프길래 언제쯤 나으려나 싶었는데, 보홀에 다녀온 지 열흘이 넘어가니 이제 그 흔적이 거의 다 사라져 간다. 피멍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는데, 피멍이 사라지는 것과 함께 보홀에서의 강렬했던 기억도 동시에 옅어지는 듯하여 어쩐지 아쉬운 요즘이다. 다행스럽게도(?) 등 쪽에 10센티미터가량 심하게 타 버린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어, 내가 보홀에 다녀온 것이 맞구나 새삼스레 실감할 뿐이다. 혹시 몰라 방문한 피부과의 의사 선생님께서는 이 피부가 완전히 돌아오려면 길게는 1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하셨다. 그 1년 안에 꼭 다시 보홀에 가고 싶다. 아마도 나는, 가게 되고야 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