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란 Jul 31. 2024

오직 바다만이 나에게

[필리핀 보홀 여행기] 1부. 프린이가 바다에 닿기까지

7월 18일, 여름방학식이 진행되었다. 휴직을 하지 않고 2024학년도의 1학기를 버텨 낸 나를 위해, 나는 7월 22일 밤 필리핀 보홀섬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나를 프리다이빙의 세계로 인도해 주었던 내 버디가 6월 중순에 던졌던 여행 제안을, 내가 덥석 받아들이면서 성사된 여행이었다. 그 무렵 나는 1학기 기말고사와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느라 지쳐 있었고, 남은 한 달을 살아 낼 이유가 필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여행을 통해서 올해의 나에게 선물처럼 찾아온 '프리다이빙'을 계속해 나갈 동력을 찾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지난번 글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었던 (프리다이빙을 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이라 할 수 있는) '이퀄라이징'에서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나름대로 노력을 안 해 본 것도 아닌데, 애를 쓴다고 썼는데도 따라 주지 않는 나의 귀 상태에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 짜증이 났던 것도 사실이다. 즐겁자고 찾은 취미에서 이렇게 스트레스까지 받아야 하나 싶기도 했다. 잘하고 싶은데 마음만큼 잘하지 못해서 의욕이 떨어진 나란 사람에게는 보다 큰 차원의 자극이, 온몸에 와닿는 신선한 감각이 필요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오직 '바다'만이 나에게 필요한 그 무언가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나의 첫 필리핀 여행이, 바다를 찾아 떠나는 보홀로의 여정이 무작정 시작되었다.




나름대로 분명한 이유를 안고 시작한 여행 치고, 나의 준비 과정은 참으로 보잘것없고 무책임했다. 여행의 시작부터 끝까지 나는 나의 버디에게 대체로 얹혀 갔다. 이미 필리핀 보홀에 한 번 다녀와 본 적이 있었던 버디의 주도하에, 나는 이렇게 수월하고 편한 여행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여행 계획이 착착 마련되어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너무 민폐였던 것을 알아 핑계를 대기에도 부끄럽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예상치 못한 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여행 전날까지도 너무 정신이 없었다.

   학교 일은 아니었고 겸직 허가를 공식적으로 받아서 하게 된 출판 관련 일이었는데, 마감일이 이렇게 빠듯할지 모르고 내가 선뜻 응했던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뒤늦게 마감일을 확인하고 몇 주에 걸친 주말을 오롯이 쏟아부어 약속한 기한 내에 원고를 넘기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그 와중에 여행 계획까지 세우기란 불가능했다. 수없이 괜찮다고 말해 주며 여행에 필요한 중요한 것들을 나서서 챙겨 준 고마운 나의 버디가 아니었다면, 이 여행은 이루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7월 22일 밤 비행기로의 출국을 앞두고, 나는 7월 21일 저녁부터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래도 프리다이빙의 세계를 맛본 프린이라고, 내 평생 캐리어 속에 넣어 본 적 없는 짐을 챙기고 있자니 기분이 묘하고 사뭇 달떴다. 오리발(핀), 마스크, 스노클, 수영복, 워터레깅스, 래쉬가드……. 이런 것들이 내 캐리어를 가득 채웠고, 나는 그제야 진정한 여름방학을 맞이한 듯 해방감과 자유를 만끽했다. 정말이지 내가 바다를 향해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떠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원래 밤 10시 즈음 출발할 예정이었던 비행기가 운항 사정으로 1시간 지연된 것도 모자라, 공항 사정으로 이륙하기까지 대기 시간이 발생하면서 나와 버디를 태운 비행기는 7월 23일로 넘어간 자정이 지나서야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4시간이 넘어가자 비행기 창문 밖으로 낯선 곳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물론 해가 뜨기 전 가장 어두운 새벽 시간이라 불빛으로 어림짐작할 뿐이었지만 말이다.

   단출한 규모가 조금은 정겹고 귀엽게 느껴지는 '보홀-팡라오 국제 공항(Bohol–Panglao International Airport)'에서 입국 심사를 받고 수화물을 찾 공항 밖으로 나왔다. 다른 한국 승객들처럼, 우리도 버디가 미리 예약해 둔 교통편을 기다려 처음 이틀을 묵을 숙소로 향했다. 당당하게 우리 숙소 이름을 대고 얼마 걸리지 않아 그곳에 도착한 것은 새벽 4시가 다 되어 가는 늦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숙소 직원분이 우리의 예약 서류를 찾지 못하시는 것이다. 서로가 어리둥절해서 안내 데스크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던 찰나, 우리는 한순간 문제의 원인을 깨달았다. 이름이 엇비슷한 숙소들이 여러 있었던 탓에 내가 예약한 숙소와 버디가 이해한 숙소가 서로 달랐고, 그렇게 우리는 잘못된 숙소로 찾아갔던 것이다. 그런 우리 때문에 존재하지도 않는 서류를 한밤중에 찾아 헤매느라 고생해 주셨던 직원분이, 감사하게도 그 늦은 시간에 교통편(툭툭)을 알아봐 주셔서 다행히 우리는 우리가 예약한 진짜 숙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 여행 초반부터 액땜했다 싶은 이런 에피소드가 생기다니, 어쩐지 이번 여행은 무탈하게 흘러갈 것만 같았다.




다만 내 몸 상태만은 함께 액땜을 끝내지 못했으니, 물놀이를 앞둔 사람에게 가장 큰 적이라 할 수 있는 생리가 필리핀 보홀로 향하기 며칠 전 시작해 버린 것이다. '에이, 설마 여행 일정과 주기가 겹치겠어.' 하며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 문제였을까. 출국 전 부랴부랴 한 번도 써 본 적 없던 체내형 생리용품(탐폰)을 사서 시도해 보았으나 장렬히 실패하고, 혹시 몰라 평소에 쓰던 생리용품을 부러 넉넉히 캐리어에 눌러 담았다. 내 캐리어의 절반은 물놀이와 관련된 것이었고,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 나머지 절반의 절반이 생리용품이었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없는 조합인지!

   내가 이런 상황에서 물속에 몸을 담글 수나 있을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에 들어가려고 기를 쓸지, 보홀에 도착한 순간의 나조차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오직 바다만이 나에게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들을 이곳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그때는 정말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캐리어에 챙겼던 짐 중에는 돌고래 가방도 있었다. 7월에 있었던 버디의 생일을 맞아 내가 (강제) 커플 아이템으로 선물한 것이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귀엽지 아니한가!
작가의 이전글 살기 위해 숨 참기 연습 중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