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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이야기 Jul 21. 2024

경계를 허무는 언어

<목욕탕> <용의자의 야간열차>를 읽고

다른 언어로 쓴다


 책 읽기도 안 하는데 글을 쓰는 행위가 과연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가질까 생각해 봤었다. 심지어 다른 나라의 언어로 글을 쓰는 행위를 왜 하는지 궁금해진 계기가 있었다. 바로 '줌파 라히리'라는 작가 덕분이다. 그런데 여기 '다와다 요코'라는 작가도 그렇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세상에 이런 작가가 하나가 아니라니 대체 얼마나 많은 작가가 다른 언어로 글을 쓰려고 하는 걸까..


 줌파 라히리 <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 중에서 발췌한 문장들을 아래 적어봤다. 다른 언어로 왜 쓰게 됐는지에 대한 답이라고 느껴진다. 그저 쓰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나도 비슷한 이유로 글을 쓰게 됐다고 느낀다. 내가 느끼는 세계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고 이야기하고 싶고 그를 통해 다른 사람과 교류를 하고 싶어 한다.


<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 중에서 발췌한 문장들

글쓰기란 다름 아닌 세계를 인식하고 관찰하고 시각화하는 것이니까. p.37
어떤 언어에 대한 익숙함, 능통함, 용이함이 다른 형태의 실명을 부여하기도 한다. p.38
'접목'은 보편적인 인간의 충동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개념이다. 우리 각자가 왜 무언가 다른 것, 조금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획득해 나가는지 설명해 준다.
... 한 사회와 문명이 전진하고 발전하려면, 자양분의 원천을 바꿔나가는 게 중요하다. 내 소설집 [그저 좋은 사람]의 제언으로 쓴 너대니얼 호손의 문장을 인용하자면, "인간의 본성도 감자와 같아서 오랜 세월 한 곳에 계속 심으면 땅이 메말라 번성하지 못할 터이다." 언어든 사람이든 나라든, 모든 것은 오직 타자와의 접촉, 친밀, 교류를 통해서만 새로워진다. p.43
"예술가는 결코 작품을 완성할 수 없으며 다만 포기할 뿐이다"라는 폴 발레리의 말뜻을 나는 자기 번역을 통해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p.118
자기 번역은 후퇴와 전진이 한꺼번에 진행되는 당황스러운 역설이다. 앞으로 밀고 나아가려는 충동과 저지하려는 묘한 중력의 방해 사이에 끊임없는 긴장이 있다. p.121
우리는 책을 쓸 때 어느 고정된 순간, 의식과 발달의 특정한 국면에 놓인다. 그래서 수년 전에 써놓은 말을 읽으면 생경함을 느낀다. p.127
여러 언어를 알고 있으면 사고를 체계화하는 데에 능숙함과 명료함을 훨씬 더 발휘할 수 있으니, 그건 우리의 사고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탓이다. 한데 어떤 언어도 무한한 생각의 묘미에 상응하는, 그것을 모두 표현할 만큼 충분한 단어와 구절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여러 언어에 지식이 있고, 그리하여 한 가지 언어로 말해질 수 없다던지 적어도 다른 언어로는 간단명료하게 표현하기가 어렵거나 그 정도로 신속하게 표현을 찾기 힘들 때 다른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우리가 각자의 사고를 표명하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아울러 말을 생각에 적용하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결국 말로 적용되지 않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인 상태로 남을 것이다. -레오파르디의 말 pp.196-197
오직 '언어들'만이 우리가 자신을 표현하고 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언어들'은 우리 내면의 무한으로, 그 공간과 침묵으로, 어떤 국가나 정의도 닿지 않고 어떤 울타리나 경계에도 갇히지 않는 그 감미로운 침잠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2021년 로마 p.197


 다와다 요코의 <목욕탕>에서 '큰소리를 지르는 대신에 나는 소리를 얼렸다가 떼어내죠(p.42)'라는 대목에서 저자가 인식하는 세계를 얼핏 엿본 느낌이 든다.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고 글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경계를 지을 수 있지만 소리를 형태로 바꿔놓음으로 그 경계를 허물고 있다. 줌파 라히리도 '언어들'은 어떤 경계에도 갇히지 않는다고 표현한다. 작가들은 경계를 다르게 보면서 자신을 더 알아갈 수 있도록 길을 찾고 있다.


 줌파 라히리 <로마 이야기>는 다른 나라 언어인 이탈리아어로 썼다. "몇 번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까?"라고 책에서 이야기한다. 지금까지는 물리적인 환경을 바꾸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었다. <목욕탕>에서도 남자친구의 직업이 사진작가로 등장했다가 선생님이다가 목수로 바뀌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 이후에 중간중간 책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나를 바꿀만한 책을 읽게 되면 역시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언어를 배워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독일문학을 다루는 모임을 하면서 언어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다른 언어를 배우는 과정 또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방법이라는데 동의하게 됐다. 새로운 언어가 아직은 나와 친하지 않은데 시도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씩 실천해 볼까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여행하는 언어


 <용의자의 야간열차>는 야간열차를 탄 경험을 바탕으로 써져 예전 열차를 탄 경험이 소환되지만 작가의 글과 그때의 나는 대척점에 존재하는 듯하다. 작가는 현실을 기반으로 두고 생각을 확장해 경계를 넘나들며 여러 상상과 사유를 진행시킨다. 야간열차를 탔던 20대의 나는 거의 상상과 사유를 하지 않았던 때라 그때의 기억을 돌이켜봐도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던 잠깐의 기억만 난다.


 이후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소설을 읽고 나서 이 책을 읽다 보니 현실에서 시작해 사유하는 글쓰기의 매력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 것도 같다. 특히 <G.H. 에 따른 수난>은 가히 역대급 소설이었다. 이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을 이야기하기 힘들기 때문에 번역을 했던 배수아 작가의 말로 대체해 본다.

존재와 언어의 심연이 열린다.


 다와다 요코는 아마 다른 언어로 소설을 쓰면서 여행하는 질감을 글로 쓰고 싶었던 것 같다. 다수가 사용하는 언어를 얼마나 다르게 쓸 수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이후 정치권력과 관련된 다와다 요코의 번역과 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문학의 언어를 읽는다는 것은 이동하지 않은 채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사는 것이며, 그 장소를 떠나지 않고서 움직이는 것이다. 질 들뢰스가 말하는 '제자리에서의 여행'의 가장 손쉬운 방법 중 하나가 독서일 것이다. 문학을 통한 '제자리에서의 여행'은 다양한 언어의 영토를 오간다. 이를테면 번역문학이나 번역이라는 행위, 각국어문학과 '세계문학', 또는 지역어와 국어, 방언과 표준어, 나아가서는 구전문학과 그 현대어역  등, 우리 주변의 문학은 언어 사이의 번역이나 언어 내의 번역을 중층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문학 '읽기'의 방법들> p.105
'언어의 탈영토화'란 "어떤 언어 안에서 그 언어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지, 그 언어의 사용 자체를 멈추거나 외국어 같은 또 다른 언어를 말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수 언어의 소수적 사용을 창출하는 것... 중요한 것은 지배적 규범적인 역할을 하는 '다수언어'의 지배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얼마나 언어를 비켜 놓는가 하는 점이다. <문학 '읽기'의 방법들> p.107


언어를 둘러싼 정치권력


 말하기는 언어능력의 단순한 수행이 아니라 권력 투쟁이라고 했던 부르디외가 떠오르는 <목욕탕>의 한 장면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주인공이 통역을 하게 됐을 때 일본인들이 통역을 하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알고 무례한 이야기를 마구 던지던 장면이다. 아마도 권력관계로 인해 다와다 요코 또한 일본어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한계 때문에 다른 언어로 글을 쓰게 되면 해방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소설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 숀카네가]에서 초점을 맞추는 또 한 가지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제기한 표상의 지배라는 문제이다. 포스트콜로니얼 비평의 기폭제가 되고 한편으로는 생산적인 비판을 받기도 한 '오리엔탈리즘'에서 사이드는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현대 미국의 중동 연구까지, 서양에 의한 '동양' 표상의 작동방식, '서양'에 의한 '동양' 담론의 존재 방식을 집요하게 분석한다. <문학 '읽기'의 방법들> p.112
사카이 나오키에 따르면, 이 '사위일체'의 일본이라는 통일체는 사실상 근대에 구축된 것으로, 국민을 동일화하고 통합하기 위한 통제적인 이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실체화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일본문학을 일본에 있는 일본인이 쓴 문학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사카이는 이것이 얼마나 전도된 이해 방식인지를 일본열도의 과거 언어상황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한편, '사위일체'의 사고가 차별과 배제를 낳는 이유는, 이를테면 그 속에 일본국적을 가지지 않은 재일조선인이 일본어로 쓴 문학은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학 '읽기'의 방법들>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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