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함에 대하여>를 읽고
다양한 책을 읽다 보면 길을 걷다가도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 경험이 정리가 되지 않고 아직 비 오기 전 혼자 떠다니는 구름조각 같다. '미안함'이라는 단어로 제목을 정하고 글을 쓰는 동안 어떤 마음이었을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구름이 잔뜩 모여서 검은 먹구름이 되어 나에게 시원하게 비를 퍼붓는 느낌으로 책을 읽었다. 답답한 더위가 한창일 때 비를 만나면 반갑지 않은가. 한바탕 쏟아지는걸 흠뻑 맞고 어떤 옷으로 갈아입을지 생각해 봐야겠다.
예전에 책을 읽다가 행동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이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선한 사람의 무관심이 악을 키운다"(p.42)는 표현을 읽고 눈앞에 번개가 번쩍였다. 물론 되도록 무관심해지지 않으려 애쓰지만 아니지 무관심해보려고 노력하는데 그렇게 하면 병이 도진다. 이제는 뭔가 행동을 하지 않으면 병이 나게 됐다.
요즘 피에르 부르디외가 여러 책에 자꾸 등장한다. 상징폭력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대목에서 난 피지배자 중에 스스로를 부정하거나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왜냐하면 나 같은 경우에는 거꾸로 같은 처지의 노동자에게 절대 무관심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무관심보다는 관심이 더 많이 생기는 편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상징폭력은 피지배자에게 사회적 위계를 정당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물리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복종하게 하는 지배 기제다. 몸에 가하는 폭력과 달리, 상징폭력은 피지배자에게 지배자의 세계관, 의식, 욕망을 내면화하게 한다. 그 결과 피지배자는 열등감, 즉 스스로를 부정적이거나 무가치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노동자와 서민은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 정치인, 연예인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 반면, 자기와 같은 처지의 노동자 서민에게는 무관심하다. p.176
민주주의가 이룩한 가장 우월한 가치는 '자유'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선택을 두고 자유인으로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한 개인을 이루는 인적 자본과 물적 자본의 차이로 인해 선택권은 절대 자유롭게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선택이 미치는 영향을 다방면으로 고려해야 하는 사람과 고려할 필요 없는 경우는 큰 차이를 가져다준다.
자본 중에 교육자본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교육이 계층의 사다리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교육이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정당화한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교육받은 사람들이 쌓아 올린 정책 속에 소외된 사람들의 아우성이 화산처럼 폭발하려고 한다. 결국 저출생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선택 또한 자유롭지 않았다. 오히려 책임질 수 없기에 옳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선택한 사람들의 아픔은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좋은 환경을 제공받은 사람들만 가지는 출산이라는 선택은 가장 불평등하게 됐다. 일자리 또한 내가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권리인데 박탈될 위험 속에 살고 있는 불안한 사람들에 대한 감정이입은 전혀 안되나 보다. 감정이입 또한 선택의 자유라고 말할 생각일까.
교육이 한 사회의 생산력을 확장시켜 줄 수는 있다. 하지만 교육이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해 준다고 믿을 근거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와 장클로드 파스롱이 "교육은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정당화한다"라고 주장했던 것이 반세기 전의 일이다. p.67
기적처럼 난민으로 인정받아도 노동허가제가 아닌 고용허가제여서 노동권이 없고 고용주에게 '간택되어야' 겨우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곳. p.52
자유를 기치로 내세운 민주주의의 단점이 최근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번 총선에서도 근소한 표차로 당선된 사례가 많아졌다. 점점 투표가 민의를 정확하게 대변하고 있는지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상황이다. 예전부터 수많은 사람에 의해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사실(p.214)이라는데 비례대표제 또한 거꾸로 역행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까 의심스럽다. 어쩌면 혁명을 앞당기기 위해 잠시 중세시대처럼 역행하는 것일까.
소선거구제 아래에서는 국민 40퍼센트 정도의 지지로 국회 의석의 60퍼센트 가까이를 차지할 수 있었다... 소선거구제가 민의를 대변해야 하는 국회 구성 자체에서 민의를 왜곡한다는 점, 민주주의가 성숙된 나라는 비례대표제를 실시하고 있다는 점, 그중에서도 독일식 비례대표제가 민의를 가장 정확하게 대변한다는 점 등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에 의해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사실이다. p.214
우리는 계속 공부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아래 문장이 반가웠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귀국 전에 "우리는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나?"라는 내 물음에 대한 프랑스 역사 교수의 거침없는 대답이었다. p.234
조귀동은 저서 [세습 중산층 사회]에서 오히려 한국 사회의 계층화가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p.105)고 한다. 조금 더 생각해 보자. 대부분 20대 이후에 공부를 중단하는 현상을 보인다. 그렇다면 20대 이후에 지속적인 학습을 하게 되면 중산층에 진입하거나 계층 간 사다리를 재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지 않을까.
[논어]에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라는 구절이 있다. 중국의 각급 학교에 붙어 있다는 글귀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뜻(p.80)이라고 한다. 만약 지금의 어른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배우고 생각하면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까 궁금해진다. 가깝게 전태일 열사의 경우 뒤늦게 공부했고 그로 인해 부당함을 느끼고 투쟁을 했으며 이후 많은 사람을 투쟁의 대열에 진입하게 해서 세상을 바꿨다.
계속 공부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경계했던 것을 너무 시원하게 저자가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꼭 염두에 두고 학습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학습을 게을리하여 실력이 부족하면서도 지적 우월감과 윤리적 우월감으로 무장한 '민주 건달'이 되지 않을 것을 자경문의 하나로 삼고 있다. p.182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려운 길이므로 우리가 가야 하는 것이다. p.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