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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기고가 강진우 Feb 05. 2016

아직 차 살 때 아니야, 등신아!

썸day 열한번째 날

자동차를 보고 있었다. 적어도 올해는 돈이 넉넉히 벌릴 게 확실했다. 내년 초 결혼도 생각하고 있겠다, 내심 이제 차 한 대쯤은 굴려도 되겠지 싶었다. 휠베이스가 어떻다느니, 토션빔이니 멀티링크니, 생소한 용어들을 열심히 검색해가며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속으로 차를 바꿔댔다. 만수르 부럽지 않게, 일과 일 사이의 작은 틈을 유튜브 시승 동영상으로 메워가며.


사실 머리에 쥐가 나도록 일하고 나면 만사가 귀찮았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 별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수단으로 자동차를 택했다. 열심히 보고 나면 왠지 모르게 뿌듯하기도 했다. 아니, 밥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걱정했던 날들이 엊그제인데, 벌써 차를 뽑을 정도가 된 거야? 그래, 난 열심히 잘 살았어! 이제 즐길 때도 됐지, 뭐! 며칠 동안 연신 콧노래를 불렀다.     




무심코 달력을 보니 아차! 여자 친구 아버님을 뵐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버님이 뭘 좋아하신다고 했더라? 가장 먼저 떠오른 답은 고전이었다. 평생 책 더미 속에 파묻혀 한평생을 보내는 게 꿈이셨다고, 여자 친구가 그랬었지. 어릴 때 책깨나 읽었다고 자부하지만, 고전은 동화화된 소년문고판 말고는 읽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그 두꺼운 책들을 다 훑어볼 수도 없고, 어쩐다! 하다가 떠오른 책이 <고전문학 읽은 척 매뉴얼>이었다. 먼지를 이불 삼아 잠들어 있는 녀석을 억지로 끄집어냈다. 이걸로 어떻게든 구색은 맞출 수 있겠지, 불안함을 달래며 책장을 펼쳤다.


가장 먼저 든 생각. 고전이 이렇게 재미있었나? 김용석 작가가 썰을 잘 푸는 건지, 진짜 고전이 재미난 건지는 몰라도, 아무튼 이 책은 의외로 눈을 사로잡았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통찰을 이런 스토리로 엮어낸 거야? 불쑥 진짜 고전이 읽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런 욕구가 샘솟으면 샘솟을수록, 간지러우면서도 아련하면서도 서글프면서도 기쁘면서도 숨기고 싶으면서도 드러내고 싶은데 끝내는 아픈, 기묘하기 그지없는 감정이 명치께를 촉촉이 적셨다. 열리지 않아야 될 문이 열린 기분이었다.     




판도라의 상자가 맞았다. 돈을 벌기가 싫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 없으니 정정하자면, 지금의 일로 돈을 벌기가 싫어졌다는 말이다. 4년여 간 이곳이 내 살 길이다, 여기며 살아왔는데, 실은 그게 아니었단 걸 어렴풋이 느낀 거다. 이런 와중에 어떻게든 소설로 먹고살아보겠다며 직장 때려치우고 하루에 만 자씩 쓴다는 괴상한 녀석과, 이 녀석을 따라 직장 때려치우고 글 쓰겠다는 더 괴상한 녀석을 동시에 홍대 고깃집에서 만난 건, 명백한 실수이자 계기가 됐다. 이제 와서야 자각한 바를 용기 내어 고백하건대, 난 여태껏 글로 먹고살아본 적이 단 한순간도 없다.


당연히 원고 쓰고 기사 쓰니까 글쟁이 아니야? 천만에. 이건 기자 혹은 에디터라 불리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지, 글쟁이가 해야 할 일이 아니었던 거다. 주제와 기획 의도, 단락 수와 분량, 심지어 핵심 키워드까지도 정해져 있는, 그래서 고작 할 수 있는 거라곤 문장 좀 다르게 쓰는 것밖에 없는 그런 글을, 그런 글도 글이라고, “나 글로 먹고산다!”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녔던 거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 글쟁이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느낌을 스스로의 기획으로, 스토리로, 구성으로, 문장으로 보여주는 직업이란 걸, 사계절을 네 번 보고 나서야 겨우 깨달은 거다. 두 눈을 가리고 있던 자위의 안대를 벗어버리자 벌거벗겨진 채 치부만 간신히 가린, 더없이 민망한 내가 서 있었다.     




먹고사는 일, 그 무엇보다도 신성한 것 안다. 내 입에 부족함 없이 음식물을 집어넣을 만한 돈이 있기에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것, 돈 못 벌어본 적이 있어서 절실히 깨닫고 있다. 그러나 먹고사는 행위가 전부가 아님 또한 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무엇보다도 내 글을 쓰고 싶다. 

내가 생각하고 느낀 바를 온전한 내 문장으로 써 내려간, 바로 그런 ‘살아있는 글’.


일을 꽤 많이 줄이기로 했다. 눈앞에서 천 단위가 어지러이 왔다 갔다 하는데, 멀미나서 죽는 줄 알았다. 그만큼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허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눈 감고 저 세상으로 가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서 못 먹어도 일단 간다. 눈에 흙 들어가면 진짜 많이 따가울 것 같거든.


다행히 바보 같은 우군이 하나 있다. 곧 있으면 자기랑 같이 살 남잔데, 마음먹었으면 해보란다. 이 여자에게 보답하는 방법 역시 못 먹어도 굳세어라 금순이처럼 우직하게 나아가는 것임을 안다. 그래서 더더욱 열심히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이제야, 자동차를 비교 분석하던 얼마 전의 나 자신에게 ‘이 새낀 뭐하는 새낀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 차려, 인마! 지금 차 살 때 아니야! 그 돈으로 고전문학전집을 사서 읽고 미친 듯이 써, 이 등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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