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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기고가 강진우 Mar 14. 2016

‘도를 아십니까?’와 거지꼴

썸day 열두번째 날

일도, 약속도 없는 날이면 내 몸은 끝도 없이 편안함을 추구한다. 먹고, 눕고, 낮잠 자고, 카페에서의 여유를 즐긴다. 자연스럽게 옷차림도 이런 습성을 따라가게 마련이어서, 시공간을 초월하는 백수의 후줄근함을 자랑한다. 어디 가서 자랑할 바는 아니지만, 또한 어디 내놔도 한 치 부끄럼 없는 순도 100% 자발적 거지꼴이다.


유니클로의 회색 기모 트레이닝 바지와 검은색 후드 집업, 악어가죽 무늬 비스무레한 블랙야크 점퍼와 LA 다저스 로고가 박힌 연회색 MLB 모자, 여기에 에버랜드 앞 좌판에서 산 3만 원짜리 새까만 아디다스 운동화까지 더해지면 비로소 ‘동네용 패션’이 완성된다. 카페에서 노트북 가지고 놀라 치면 오래 되어 여기저기가 해진 거무튀튀 버카루 백팩이 추가된다. 흑백텔레비전을 보는 듯 검은색 계열 명암만이 존재하는, 바로 그런 옷차림이다. 


그런데 이 우중충한 패션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도를 아십니까?’ 무리다. 평소 이런 차림을 한 나는 점퍼 주머니에 두 손을 끼고 미간을 약간 찡그린 채로 빠르게 걸음을 옮기곤 하는데, 이런 경우 세 번 중 한 번은 꼭 이런 부류를 만난다. 아니, 그들이 기어코 가만히 지나가는 나를 붙잡는다. 




“저기요, 말씀 좀 한 번 들어보세요.” 그들이 이런 말과 함께 위험 반경 안으로 다가서면 마음속으로 외친다. ‘부스터 온!’ 2배속으로 빨라진 걸음걸이는 웬만해서는 그들에게 접근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런데 간혹 “저기요!”를 외치며 끝까지 따라붙는 자들이 있다. 이럴 때는 싸가지를 상실해야 한다. 굳게 마음먹고,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묻는다. “이거 하면 돈 얼마나 벌어요?” 일말의 미안함이 명치께를 후벼 파지만 어쩔 수 없다. 모질게 굴지 않으면 그들은 언젠가 어깨를 잡아챌 것이고, 생판 모르는 남과 허송세월을 보내게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도 한두 해 전 일이다. 요새 그들은 더욱더 교묘한 방법으로 이목을 붙잡는다. “저기, 잠시만요. 길 좀 여쭐게요.” 누군가 당신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면? 장염에 걸리지 않은 이상 십중팔구 멈춰 선다. “여기 순대타운이 어디예요?”, “아, 저기 길 건너셔서 오른쪽으로 쭉 걷다 보면 나와요.” 제법 친절한 척 말꼬리에 친절한 미소까지 띄운 나는, 그들의 다음 말에 경악한다. “아, 네. 저기, 그런데 우환이 있어 보이세요. 잠깐 말씀 좀 들어보실래요?” 


이런 경우를 몇 번이나 당하니, 본의 아니게 정말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피해 달아나기도 한다. 얼마 전, 막 시골에서 상경한 듯한 두 아주머니가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 나를 보고 “서울 인심 못 쓰겠네.”하는 바람에 낯을 붉힌 적도 있다. 이건 내 싸가지 문제가 아닌, 선량한 사람을 어떻게든 붙잡고 늘어지려는 ‘도를 아십니까?’ 무리의 문제다.




아마 그들은 나를 취업 못해 시름 깊은 취준생쯤으로 생각하고 다가왔을 것이다. 지나치게 실용주의로 치우친 옷매무새와 세상 싫다는 듯한 찡그린 표정이 절묘하게 조합되었으니. 그렇다면 결국 진범은 그들을 오해케 한 나인가. 아니다. 만약 그렇게 오해하고 다가왔다면, 세상 싫은 사람 돈을 앗아가려고 한 것이니 그들은 더더욱 악질이다. 허나 ‘얼마나 살기 힘들면 저렇게 살까….’ 동정심 섞인 눈으로 바라보면 또 그들이 안쓰럽기도 하다. 그들이라고 처음부터 그렇게 살고 싶었겠냐는 말이다.


그리하여 비록 나의 동네용 패션을 버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표정은 좀 바꿔볼까 한다. 사실 사람 많은 곳에 나오면, 마치 동그라미 수십 개 그려진 종이를 무서워하는 환 공포증 환자 같은 심정이 되어서 사람들을 어떻게든 피해 다니기 위해 신경 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미간이 내천자로 변하는 것이지만, 우환으로 비춰진 나의 자기방어적 찡그림이 그들을 서슴없이 다가오게 했으며 이로 인해 시골 아주머니들에게 ‘서울 사람은 싸가지 없다.’는 편견을 심어줬으니, 결국 나와 그들과 시골 아주머니들이 모두 손해 본 꼴이라서.


그럼에도 그들이 들러붙으면 어떻게 한담? 그건 그때 생각하고, 이것부터 실천해 보련다. 지나친 고민은 곧 겁쟁이 혹은 게으름뱅이의 변명이니. 어쨌든 그 사람들 덕분에 인상은 조금 좋아지게 됐으니, 인생을 허비하는 듯 살아가는 그들도 누군가에는 자그마한 구원인 건가?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는 없다는 개똥철학적 결론에까지 다다르기 직전이니, 이제는 말을 줄이는 걸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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