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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기고가 강진우 Mar 23. 2016

화곡동, 위로(慰勞) 한 잔

썸day 열세번째 날

두 볼은 소맥으로 불콰해졌지만, 일차로 먹은 소 곱창은 한 끗이 부족했다. 그리하여 화곡동은 깔끔하지 않은 첫인상을 남겼다. 술자리를 제안한 그녀가 카드를 꺼냈고, 나는 이러면 서운하다고 주장했다. 이차의 시발점이었다. 


당최 와본 적 없는 동네라 적당한 술집의 유무는 요원했다. 다만 소 곱창을 뛰어넘길 바라며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화곡역 칠번 출구 거리는 번잡했다. 자동차 소음과 가게에서 틀어놓은 온갖 최신곡들, 사람들의 온갖 사연이 뒤범벅되어 달팽이관을 때렸다. 네온사인 바다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표류하고 있었다. 돛 없는 뗏목처럼 정처 없이 역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찰나, 큰길 반대편에 하얀색 간판이 보였다. 검게 새겨진 ‘BEER PUB’ 글자를 보자마자 “저기 어때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좋아요!” 그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색으로 도배된 좁은 계단을 올라 이층에 올라서자 그곳이 보였다. 여덟 시 즈음이었는데도 손님 하나 없었다. 방금 전까지 앓고 있던 ‘번잡 공포증’은 이곳에서 딴 나라 희귀병으로 취급될 터였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다찌석에 나란히 앉아 삼만 원짜리 호가든 세트를 시켰다. 맥주 네 병과 나초 한 접시가 금세 차려졌다. “호가든은요, 이렇게 따라야 해요.” 아무렇게나 잔을 채우려는 나를 제지한 그녀가 거꾸로 뒤집은 컵 바닥을 호가든 주둥이에 갖다 대고는 휙 뒤집었다. 마술처럼 서서히 잔을 채워가는 호가든. 시큼한 누룩 냄새가 한층 진하게 퍼져 나온다. “향이 좋아진 걸 보니 대리님 말이 옳네요.” 그녀가 씨익,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그녀를 높이 사는 이유 중 하나다. 


스피커에서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팔십년대풍 노래가 흘러나왔다. 음률을 안주 삼아 짠, 하고는 전세 낸 것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심심했는지 사장 아저씨가 대화의 여백 사이로 파고 들어왔다. “주변에 사세요?” 고개를 저은 그녀가 사보 취재 때문에 왔노라며, 이곳은 난생 처음이라고 답했다. 원래는 송정이 적이었는데, 작년 말 화곡으로 넘어왔다는 사장 아저씨. 자의적인 결정은 아니었던 듯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진다. 제법 세련된 무늬가 가슴팍에 새겨진 흰색 후드티를 입었건만, 그 안에는 순탄치 않은 고갯길을 넘어온 고단한 중년의 마음이 자리하고 있는가 보았다. 


그렇게 사장 아저씨와 이야기하며, 그녀와 웃으며, 선곡표를 바꿔달라고 떼를 쓰며, 시큼한 맥주는 목구멍으로 한 모금 두 모금 서서히 넘어갔다. 어느덧 사장 아저씨는 15년 단골이라고 밝힌 사십 대 초중반의 똑 단발머리 골드미스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와 그녀는 밀린 이야기를 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것도 아닌, ‘적당히 친함’이라는 포지션에 서로를 두고 있었기에 오히려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한창 속 얘기를 풀어놓고 있는데 불현듯 “보기 좋네요.” 소리가 들려왔다. 사장 아저씨와 골드미스가 우리 쪽을 보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깔깔 웃으며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짐짓 목소리를 높이는데, 골드미스가 고개를 저었다. “알아요, 둘이 일하러 온 거라며. 남녀 사이의 보기 좋음 말고, 에너지가 보기 좋다고.” 의아한 시선이 나와 그녀를 오고 갔다. 여기 와서 한 거라곤 얘기밖에 없는데, 뭐가 좋다는 건지.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우리에게 없는 힘이 느껴져요. ‘젊음’이라고들 하지. 나랑 이 사람한테서는 증발해 버린 그게, 당신들한테는 아직까지 생생하게 살아 숨 쉰단 겁니다.” 사장 아저씨가 똑 단발의 말을 이어받으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나와 그녀는 마주보며, 사장 아저씨처럼 웃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칠십 억 인구를 다 짊어진 듯 서로의 고민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저이들 눈에는 에너지틱하다니. “저거 봐. 뭐가 웃긴 말이냐고 저렇게 웃느냔 말이야. 저맘때만 할 수 있는 거라니까.” 골드미스의 애교 섞인 푸념이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중충해 보였던 거무죽죽 회갈색 호프 벽면이 이제 막 생동하는 어린나무의 껍질 빛깔처럼 화사해졌다. 심연에 품고 있던 불안이 수소 풍선을 품은 듯 한없이 가벼워졌다. 당신들은 젊다는 그 말이 깊은 위안으로 다가왔다. 엄마 품에 안긴 채 잠든 어린아이 같은 심정이었다. 


그래, 우린 젊다. 아직 갈 길 먼 30대 청춘이다. 고로 우리의 고민은, 젊은 고민이다. 나는 젊은 마음으로 잔을 들었고, 그녀는 젊은 표정으로 잔을 부딪쳤다. 그렇게 설레는 기분으로 위로 한 잔을 들이켰다. 


번잡하기만 했던, 다신 오지 말아야지 마음먹고 있었던 화곡동이, 갑자기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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