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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기고가 강진우 Apr 05. 2016

쓸쓸함의 씁쓸함

썸day 열네번째 날

쌀쌀한 춘삼월이 이어지고 있었다. 헛헛한 마음 달래줬던 어젯밤 소주 두 병은 공허함과 메스꺼움을 남겼다. 그럼에도 그날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방송국에 입사한 동생이 영등포 한 귀퉁이를 제 거처로 삼은 첫날이었다. 


“가구 걱정은 마라. 같이 이케아 가자!” 유달리 쇼핑을 어려워하는 상남자 녀석을 비웃으며, 취기가 더해져 한층 호기로워진 목소리로 약속을 내지른 게 어젯밤 11시. 녀석의 텅 빈 방을 채워줘야 했다. 대충 옷을 걸치곤 연신 구역질을 해대며 버스에 올랐다. “후우….” 날숨을 뱉을 때마다 역겨운 알코올 냄새가 퍼져 나왔다. “다시 이렇게 술 마시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6514번 버스는, 과음 때마다 늘 하는 그 부질없는 맹세를 싣고는 하릴없이 영등포 로터리로 향했다.


술로 떡이 된 형이 안쓰러웠는지, 녀석은 해장국집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그 맛이 어찌나 달던지 뚝배기 한 그릇 바람처럼 해치웠다. “뭔 술을 그렇게 퍼마셨어?” 여느 때 같았으면 형님한테 그 불손한 언행은 뭐냐며 꼬투리를 잡았겠지만, 이제 막 길거리 헤매던 정신이 겨우 제집으로 발을 들인 차였다. 형제의 약속을 술 두 병 숙취로 보답한 스스로가 부끄럽기도 했다. 바로 옆 커피집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길거리를 오가는 여자들을 구경하다가, 비로소 미리 예약한 쏘카, 레이에 몸을 실었다. 뒷좌석이 큼지막하니, 제법 가구들을 실을 수 있을 터였다.




초봄 햇살이 제법 눈부셨다. 편해진 속은 수다를 불렀다. 집안일, 각자 일, 나라 걱정하며 차를 몰다 보니 어느새 광명시. 그래도 몇 번 경험했다고, 익숙한 손짓으로 동생에게 비포장 공터 주차를 지시하곤 곧장 파란색 건물 안으로 입장했다. 


여기가 가구 쇼룸인가, 아니면 인간 쇼룸인가, 현기증이 도졌다. 발 내디딜 때마다 차이는 사람들 물결에 우리는 휩쓸리기 직전이었다. 역시 일요일 오후의 이케아다웠다. 남자 둘이서 온 만큼 우리는 최소 동선, 최소 시간의 쇼핑을 콘셉트로 잡았다. “형, 이리 와봐. 이거 괜찮아?” 녀석이 물었고, “저게 더 낫지 않아?” 내가 대답했다. 책상, 의자, 책장, 스탠드 조명을 각각 하나씩 고르자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여자 친구와 왔을 때 세 시간이 걸린 걸 감안하면 매우 효율적인 몸놀림이었다. 네 개 다 합쳐 십육만 원. “이 정도면 남는 장사지?” 속으로 애 좀 먹었는지, 녀석이 차로 향하는 내내 몇 번이고 물었다. “그래, 자식아. 오길 잘한 거야.” 세 번에 걸쳐 가구들을 하나씩 실어 나른 뒤 롯데아울렛에서 소변을 본 형제는, 어느새 퀭해진 눈두덩이를 한 채 영등포 방향으로 핸들을 꺾었다.     


집에서 가져온 전동 드라이버가 빛을 발했다. 가구 네 개가 30분 남짓에 완벽한 모습을 갖췄다. 알맞은 곳에 배치했음에도 동생 원룸은 여전히 휑했다. 몇 달 동안 안 나간 방이었다고 했었나. 오랜만에 사람을 맞이한 방은, 몸속 병균을 밀어내려는 백혈구처럼, 공허함을 무기로 불청객들을 쫓아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제부터 이 녀석 혼자서 여기를 쓴단 말이지. 방을 휘이 둘러보며 왠지 모를 안쓰러움에 젖어들었다. 눈치 빠른 동생이 얼른 현관문을 열었다. “나가자. 생필품 좀 사고 한잔하게.”




퀴퀴한 냄새 코를 찌르는 영등포 전통시장 한편에 아바이 순대집이 있었다. 순대 모듬과 순댓국 두 그릇, 소주와 청하 한 병을 각각 시켰다. 어제 먹은 소주가 부대껴서 오늘은 도저히 못 마시겠다는 나의 투정에 따른 주종 선정이었다. 아바이 순대는 일미였다. 욕지거리를 반쯤 섞어 쓰며, 우리는 인생의 고됨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 힘든 거 하나, 녀석 힘든 거 하나, 은행에서 줄을 서듯 차례차례 서로의 말을 듣고, 적절히 맞장구쳐 주고, 때로는 아프지만 꼭 필요할 만한 쓴소리도 주고받았다. 녀석과는 한 배에서 태어났어도 성격과 인생관이 천지 차이라서,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제법 자극이 됐다. 스물 이후로 제대로 한 번 싸워본 적 없을 정도로 가까워진 녀석과의 거리감이 꽤 마음에 들었다. 허나 내일은 월요일. 녀석은 출근을 해야 했고, 나는 일을 해야 했다. 그래서 서로 딱 한 병씩을 비우고 자리를 털었다. 아쉽지만 그래서 더 다음 자리가 기대되는, 그런 술자리였다.


덜컹. 문이 닫혔고, 나는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가볍지 않은 침묵이 방을 감쌌다. “갈게.” 이 말이 어떤 울림을 줬는지, 약한 소리 좀처럼 안 하던 녀석이 입술을 움직였다. “뭔가 쓸쓸한 느낌이네. 그게 씁쓸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느낄 고약한 감정을, 녀석은 자신의 보금자리가 될 이곳에서 느끼고 있었다. “손 타면 점점 나아질 거야.” 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혼자 가겠다는 내 뒤를 쫓아온 녀석은, 막상 버스가 오자 “귀찮으니까 빨리 가라.”며 짐짓 대거리했다. 깔끔하지만은 않은 뒷맛에 대한 반항 같아 보였다. 버스에 올라 동생 쪽을 바라보니, 녀석은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었다. 


쓸쓸함의 씁쓸함. 


녀석도 나도, 필연적이면서도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인간 본연의 고독을, 잘근잘근 곱씹어 겨우겨우 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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