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유기고가 강진우 Jul 25. 2017

박열과 후미코, 그리고 나의 사랑

썸day 열여덟 번째 날

                         

만남이 절실한 순간들이 있다. 내성적인 천성으로 친구의 범위를 좁혔고, 스스로 선택한 생애 최초의 일은 필연적으로 고독을 요구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하루아침에 죽음으로부터 홀로서기를 강요받은 뒤 카페 한구석에 앉아 일하다가 문득 고막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재즈 선율의 존재를 느꼈을 때 특히 그랬다. 그리고 7월 어느 날 동탄 한 영화관에서 박열과 후미코를 만났을 때, ‘저런 사랑이라면 당장 죽어도 좋겠다’고 확신하며 또 한 번 절절하게 만남을 그리워했다.


영화 <박열> 속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인생 궤적은 이준익 감독을 통해 어느 정도 수정됐을 터. 그걸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원체 후미코가 매력적인 것인지 아니면 이준익이 타고난 이야기꾼인 건지, 스크린에 비친 후미코는 지금까지 본 수많은 여성상 중 이상형에 가장 근접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니, 박열과 후미코의 사랑이 꼭 그랬다. <개새끼>를 매개로 한, 거칠고 반항적일 것만 같았던 둘의 사랑이 어쩌면 그토록 숭고하고 헌신적일 수 있었을까. 감탄하며, 부러워하며, 질투하며,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나갔다.


비록 언행은 상이하나 지향점만큼은 한여름 한낮 태양처럼 강렬하고 뚜렷했던 두 사람, 그것은 이미 사랑의 한 단면을 넘어선 일심동체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이들의 사랑은 지극히 신화적이며, 정신 차려야만 겨우 살아갈 수 있는 이 각박한 세상에서는 매우 이루기 힘든 판타지적 면모를 두루 갖추고 있다. 영화관을 나선 뒤, 감동과 절망이 뒤섞인 묘한 여운이 양 관자놀이 사이를 유유히 흘러 다녔다. 살아생전 저런 사랑은 구경조차도 못할 것이라는 확신적 비관과, 그러나 최소한 나만큼은 누군가와 저런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이기적 욕망이 허물 벗는 뱀처럼 끊임없이 꿈틀거렸다. 덕분에 멀미가 났다. 만남이 더욱더 두려워졌고, 곱절로 그리워졌다.


이토록 카오스적인 감정에 온몸을 떨면서, 집에 도착해 처음으로 한 일이란 게 겨우 <박열> 포스터를 책상머리에 붙인 것이다. 그리고 핸드폰 잠금화면과 바탕화면을, 카카오톡 프로필을 온통 박열과 후미코로 도배했다. 사실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아나키즘을 챙길 여유는 없었다. 오로지 두 사람이 보여준 사랑의 정수를 동경했다. 불나방 같이 한순간 활활 타올랐지만, 결코 꺼지지 않은 그 냉정하고도 지극히 열정적인 사모의 불꽃을.


평생 사랑하며 살고 싶지만, 그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니, 언젠가 누군가를 만나겠지만 그 만남이 내가 그토록 절실해 하던 것이 될 수 있을지가 물음표다. 그것을 일생 동안 사랑이라 부르며 살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새로운 만남을 갈구하고, 설레는 고백을 바라고, 아찔한 잠자리를 욕망하며, 사랑을 넘어선 동반자적 의리를 그린다. 그럴 수 없을 것이라 단정하면서도 평생 사랑하는 삶을 여전히 간절하게 꿈꾼다. 


박열과 후미코처럼 사랑할 수 없다면 단순하게 해답을 구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서른둘에게 떨어진 흔하디 흔한 고민, 연애를 위한 사랑과 사랑을 위한 연애 중 어느 길을 걸을 것인가. 혹자는 결국 같은 곳에서 만난다고 말하지만, 사실 전자와 후자는 엄연히 다른 문제다. 사랑은 목적, 연애는 수단이다. 목적과 수단은 무엇이 앞에 놓이느냐에 따라 엄청난 의미의 변질을 불러온다. 지금 내가 이루고 싶어 하는 만남이 어느 방향으로 치우쳐져 있는 것인가. 모두가 연애 타령을 하기에 사랑하고 싶은 것인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기 위한 방도로 연애를 하고픈 것인가. 쉽사리 답을 내릴 수 없다.


깊게 패인 상처의 계곡 사이로 부는 찬바람에 치를 떨면서도 여전히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사랑을 해야 사는 운명인 걸까. 아마 미안함과 죄책감을 가질지언정 누군가를 향해 나 자신을 온전히 던져야 하는, 그렇게 생겨먹은 인간인가 보다. 박열과 후미코의 사랑을 꿈꾸지만 또한 현실에서의 실존적 사랑을 원하는, 이상주의적 리얼리즘을 꿈꾸는 모순된 로맨티시스트. 아마 이 아이러니가 사랑에 관한 나의 솔직한 정체성이지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그것이 알고 싶다> 1034회를 혐오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