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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기고가 강진우 Sep 03. 2017

쓴맛

썸day 스물한 번째 날


매일 쓴맛을 본다. 요즘 작업실로 쓰는 시립 도서관 종합열람실 구석 자리 백구십칠 번에 앉아, 사은품으로 받은 카누 텀블러에 하늘색 아이스 블렌드 아메리카노 두 봉지를 휘휘 저어 맑디 맑은 정수기 물을 기어코 진갈색으로 만들었을 때. 그 한 모금을 꿀꺽 삼키고 백육십만 원짜리 삼성 노트북을 펼쳐 한글 프로그램의 희디 흰 바탕과 마주했을 때. 그곳에 지렁이 같이 꿈틀거리는 몇천 자 글씨를 어떻게 채워 넣을까, 양쪽 관자놀이를 마구 누르며 깊고 깊은 고민과 번뇌에 사로잡혔을 때. 그럴 때 은빛 텀블러를 들어 또 한 모금 쓴맛을 본다. 오늘 하루도 쓰겠구나.


쓴맛은 불쑥불쑥 찾아온다. 박원이 ‘all of my life’를 부르며 “없진 않지만 더 많이 가져야 사랑도 이어갈 수 있는 이 세상에서” 구절을 읊조릴 때. <쇼미더머니 식스>의 톱 식스에 진출한 열세 살 우찬이가 수려한 외모와 상큼한 랩핑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살살 녹일 때. 우원재가 알약 두 봉지의 깊고 어두운 세상 속으로 사람들을 끌고 들어가 “돈 여자 술 없이도 난 홀로 건배”라 절규하며 사람들의 환호와 감탄을 온몸으로 받을 때. 세상에는 저런 재능들도 있구나, 침대에 누워 그들의 활약상을 넋 놓고 지켜볼 때.


어릴 적에는 달콤한 커피를 좋아했다. 에스프레소보다 커피믹스에 손이 갔고, 어쩌다 아메리카노라도 마실라 치면 시럽 두 번 깊게 짜 눌렀다. “역시 커피는 달아야 제맛이지!” 외치며 맛봉오리에 와 닿는 짜릿한 달달함을 신봉했다. 그런데 입맛이 변한 건지, 세월이 지난 건지, 지금은 아니다. 커피집 점원이 “시럽 넣으시나요?” 물으면 “아니요.” 단박에 자른다. 더운 날씨에 이슬 맺힌 플라스틱 컵을 들고는 그 진갈색 쓴 물을 쪽쪽 빨아 마시며 전국을 쏘다닌다. 


삼십이 년을 살며 충분히 배웠다, 인생은 원래 쓴맛이라고. 혁오가 말한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종국에는 홀로 죽는다는 사실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며. 너는 되는데 나는 왜 안 되냐고, 소주 두 병 쏟아붓고 자괴감에 빠져들며. 너는 되는데 나는 왜 안 되냐고, 나를 보며 쏟아붓는 누군가의 저주를 한 귀로 흘려가며. 인생은 그렇게 아메리카노처럼 쓴맛이라고, 삼십이 년이 그렇게 나를 가르쳤다. 


그런데 입맛이 쓴 와중에도 해낸 것들은 몇 개 있다. 사대보험은 적용되지 않을지언정, 꼬박꼬박 일정한 월급은 못 받을지언정, 남부럽지 않을 정도의 수입으로 채워지는 한 달 한 달이 켜켜이 모이고 있다는 것. 프리랜서인 주제에 한 달 내내, 하루 종일 일에 치여 산다는 것. 그 끝에는 계좌에 꽂힌 짭짤한 숫자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쓰디쓴 일상을 보내고 있음에도 쓴 커피 즐기며 행복한 일로 행복하게 돈 벌어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 이 인생이 곧 나임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하루하루 글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는 것. 


내 글은 욕망덩어리다. 끊임없이 갈구한다. 돈을 갈구하고 자리를 갈구하며 안정을 추구하고 클라이언트의 의중에 부합한다. 그리하여 일을 맡긴 사람들이 충분히 만족하는 글들을 재빠르게 써 재낀다. 기획, 제안, 취재, 자료조사, 인터뷰, 칼럼, 에세이, 정보기사, 돈 되고 청탁 들어오면 뭐든지 꾸미고 쓴다. 내 글을 써야‘만’ 한다는 고집은 꺾은 지 오래. 기획하고 써서 돈으로 연결되는 일을 갈구한다. 그러다 보니 글장인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장인들이 으레 하듯 주문에 맞춰 기술을 활용하고 그 과정 속에서 나온 결과물을 팔아먹고 사는, 바로 이 프로세스를 정밀한 기계처럼 잘 해내고 있다. 예전에는 이런 일들이 속물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내 글 못지않게 속물근성도 좋다. 내 글이 작품으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내 글을 작품으로 봐주는 사람들이 늘어서 좋고, 이게 돈으로 연결돼서 행복하다. 씁쓸한 하루의 끝이 제법 충실하게 느껴지는 건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쓴맛은 쓴맛대로 매력이 있음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어 기분 좋다. 달콤하면 좋지만 너무 달면 금방 싫증나니 싫다. 그러느니 차라리 쓴맛을 택하고 말지. 하루하루가 쓸 거라고 단념하면서도 하루하루의 끝이 뿌듯할 것이라는 설렘을 품고 산다. 이런 밑바탕에서 모든 일과 마주하니 분명히 쓴데 달게 느껴지기도 한다. 쓴맛을 즐기고 그 안에서 색다른 산미를 찾는 지경에 이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입이 쓸 때가 있다. 어머니가 친구들한테는 먹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를 기자라고 소개할 때, 그런 게 아니란 걸 아는데도 괜히 내가 부끄러운 건가 싶어 “왜 엄마는 ‘글로 네 자식보다 잘 먹고 잘 산다’고 말하지 않냐, 나는 천생 글쟁이다!” 부아를 낼 때. 남자건 여자건 요즘 사람들은, 물론 프리랜서인 나도 포함해서, 전부 안정적인 쪽을 천상 낙원인 양 맹목적으로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소개팅 여러 번 거치며 피부로 느꼈을 때.


그런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제는 어깨에 쌓인 먼지를 손끝으로 털어내듯 그깟 현실쯤 툭툭 털어내 버린다. 물 한 잔 들이키면 금방 사라질 쓴맛인 것을. 그냥 즐기면 되는 것을. 내가 나로 살면 그만인 것을.


나는 쓴맛을 즐기는 글쟁이다.




자유기고가 강진우

blog.naver.com/bohemtic

bohemti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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